오피니언 조명탄

건망(健忘)과 망각(忘却)

입력 2025. 08. 07   16:05
업데이트 2025. 08. 07   16:18
0 댓글
윤성환 대명피엔씨 부사장
윤성환 대명피엔씨 부사장

 


휴대전화에서 뭘 찾으려 화면을 켰다가 열려 있던 창이나 들어와 있는 SNS를 먼저 보게 된다. 그러다 깜박한다. 뭘 찾으려 했었지? 금방 떠오르면 다행이지만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경우도 있다. 한참 지나 문득 떠오른다. 자주 겪는 건망증 중 하나다. 

중요한 약속, 주요 기념일, 납부일, 지켜야 할 의무 등 잊어버려선 안 되는 것들을 잊는 것을 ‘망각’이라고 한다. “영특한 머리보다 무딘 몽당연필이 낫다”는 영국 속담도 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생활에서 건망으로 겪는 일은 다반사다.

몇 해 전 시골 걷기 여행 중 목격한 장면이다. 어느 마을 경로당 앞 넓은 정자에 마을 노인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화투를 치고 있었다.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가까이 걸터앉았다. 무리 중 한 명이 초록색 새마을운동 모자를 쓰고 있었다. 판이 끝날 때마다 그들 중 한 명이 옆 또는 맞은편 사람에게 모자를 건넸다. 이유를 몰라 왜 그러는지 지켜봤다. 이긴 사람에게 모자를 넘겨주는 거였다. 판이 돌고 있는 중 누가 선(先)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고개만 들면 자기가 어느 순서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혜로운 룰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6·25전쟁 당시 암구호와 관련된 일화다. 우스개로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한 부대에 암구호가 정해졌다. 주로 경계작전 중 피아 식별이 안 될 때를 대비해 암구호를 사용한다. 그날 암구호는 ‘세수’ ‘비누’ 두 단어였다. 한쪽에서 “세수”를 부르면 상대가 “비누”라고 답하면 통과다.

어느 날 칠흑 같은 밤 부대 외곽 순찰을 나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초소 경계병이 인기척을 느끼고 암구호를 불렀다. “사분!”이라는 구호가 들렸다.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불렀다. 멈칫하다 같은 답 구호가 또 들려왔다. 경계병은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총에 맞은 병사가 퍼뜩 답이 떠올랐다. “사분이나 비누나!” 이 병사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사분’은 경상도 지역에서 오랫동안 써 왔던 비누의 방언이다.

건망의 암구호 일화는 전라도 출신으로도 이어진다. 당일 암구호를 순간 깜박한 병사가 “거시기”로 답했다가 같은 변을 당했단다.

건망을 강조하기 위해 누가 지어낸 콩트가 하나 더 있다.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탄 이야기다. 올라타자마자 기사에게 “강남역으로 가 주세요”라고 행선지를 말했다. 한참을 가다가 갑자기 승객이 기사에게 물었다. “지금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승객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기사는 놀라 답했다. “깜짝이야. 아니, 언제 타셨어요?” 건망증의 압권이다.

세상이 각박하고 정신적으로 분주한 삶을 살다 보면 기억 순위가 뒤바뀔 때가 많다. 현대의 삶이 머릿속 생각을 무한정 늘려 놓다 보니 건망도 늘어난다.

일상의 건망보다 망각해선 안 될 게 있다. 가족을 비롯해 소중한 사람의 기념일과 추모일이다. 은혜도 마찬가지다. 배은망덕을 건망으로 핑계대서는 곤란하다.

보은은 인간의 도리다. 곧 잃어버렸던 나라를 되찾은 80주년 8·15도 다가온다.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어 9·28 서울 수복, 10월 1일 국군의 날이다. 국가기념일을 새기는 것은 물론 잊지 않는 국민의 보훈도 중요하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