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 때 그곳 - 간도, 윤동주가 나고 자란 우리의 옛땅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 소속
숙종 38년, 백두산정계비 세우고
송화강 기점으로 국경 정했지만
마찰 우려한 조선, 두만강으로 조정
1909년 일본이 영유권 넘기고
1962년 북은 중국과 국경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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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는 ‘청과 조선 사이에 낀 섬 같은 땅’으로 한민족의 집단거주지였다. 지금은 중국의 길림성 연변자치주에 속한다. 간도는 동서로 나뉜다.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 상류인 백두산 일대를 가리킨다. 동간도는 두만강 북부 지역을 가리킨다. 동간도는 북간도라고도 부른다. 간도의 축약적 의미는 이 북간도로 통한다.
구보는 ‘간도’라는 지명이 정겹게 들리는 이유는 시인 윤동주 때문이라 여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간도 풍경을 시 속에 녹였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엔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고향 집’)
‘남쪽 따뜻한 고향’은 두만강 아래 한반도다. 간도의 조선인들은 모두 한반도를 ‘두고 온 고향’으로 여겼음을 알게 한다. 윤동주는 간도에서 태어나 청년기를 평양·서울·도쿄·교토 등에서 살면서도 줄곧 간도를 잊지 않았다. 유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을 눈앞에 둔 1945년 2월, 27세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했다. 구보가 1993년 간도 용정(龍井)의 윤동주 생가와 산소를 처음 찾았을 때는 둘 다 초라한 모습이었으나 한국과 일본에서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지금은 잘 단장돼 있다.
숙종 38년이던 1712년 청과 조선은 “서쪽의 압록강과 동쪽의 토문강(土門江)을 분수령으로 삼는다”고 명기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이로써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정해졌다. 청 총관 목극동이 대동한 화사에게 백두산 도면을 그리게 해 한 장을 조선 측 접반사 박권에게 건네주며 글을 첨부했다. “토문의 물이 흐르다가 수십 리에 이르러 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돌 틈으로 몰래 흘러 100리를 내려가서야 큰물이 나타나니, 이 물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국경을 알지 못하여 이 때문에 국경을 넘게 되는 것이다(『연려실기술』 ‘변어전고’).”
‘토문강’이 한 줄기로 반듯하게 흐르는 두만강이 아니라 가다가 흐지부지되는 송화강임을 청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당시는 국경을 넘는 양국의 월경민 문제가 마찰을 빚던 시기였다. 후금을 세운 여진족은 만주를 신성한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해 조선인들의 월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여진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온 사례들도 잦았다(『효종실록』 9년 12월 18일 등). 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금강(禁江)’이라 명명해 서로 넘지 못하게 했다. 숙종 12년이던 1686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이 발생하자 청 강희제가 호군총령을 한양으로 보내 월경한 조선인을 참형, 처벌하고 숙종에게도 책임을 물어 벌금 2만 냥을 납부하게 한 사례가 있었다(『이화사학연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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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조선이 자국 영토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실을 아쉽게 여긴다. 백두산정계비에 명기된 ‘토문강’이 송화강을 일컬음에도 챙기지 못했다. 이 일대는 일찍이 고려의 윤관이 속평강(速平江)까지 영토를 확장해 비를 세운 곳이었다(『만기요람』, 군정편).
조선은 ‘송화강이 분계’라는 사실을 목책 설치 과정에서 파악했으면서도 마찰을 우려해 두만강으로 국경을 하향 조정했다(『대한지리학회지』, 2017). 당시 조선 정부가 보인 소극적 태도가 훗날 ‘간도 문제’를 초래했다.
백두산정계비 설치 이후 160여 년간 간도의 귀속 문제는 논란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그러다 19세기 중엽 들어 청나라의 국경 경비가 소홀해지고 함경도민들이 두만강 너머로 이주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분쟁이 잦아졌다. 특히 1869년부터 2년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자 이주민 수가 늘기 시작했다.
1882년(고종 19) 청이 ‘두만강의 서쪽과 북쪽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의 이주민을 돌려보내라’는 공문을 고시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인 경계 문제가 불거졌다. 1885년 1차 국경선 책정 담판이 열렸으나 ‘백두산정계비에서 정한 토문강(송화강)으로 해야 한다’는 조선 측과 ‘두만강으로 해야 한다’는 청나라 간 확연한 입장 차이로 회담이 결렬됐다. 고종 정부는 1882년 어윤중으로 하여금 백두산정계비의 탁본을 떠오게 해 증거로 제시했다. 1887년 2차 담판도 청나라 관원의 일방적인 요구로 확정 짓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북여요선』, 이범윤).
청이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과 일본과의 전쟁(1894)에서 연패한 데 이어 태평천국의 난과 의화단 운동으로 망국의 조짐을 보이자 고종 정부는 1897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함경도 관찰사에게 백두산 분수령의 강을 조사하게 했다. 1902년에는 시찰사 이범윤에게 명령을 내려 간도 백성을 우리 호적에 편입시켰다. 내부대신 이건하의 상주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이범윤이 간도의 백성 2만7400호를 위로하고 남녀 10만여 명을 대한(大韓)의 호적에 편입시켰다.
이범윤이 『북여요선』에 비로소 되찾은 주권 국가의 목소리를 담았다.
“북쪽 변경 지역은 우리나라가 본래부터 소유한 강역으로 우리 백성들이 날로 불어나고 있는데, 청나라가 호시탐탐 예전의 위세를 믿고 그대로 넘어와 점거하고 있으니 토문강을 두고 경계를 다툰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이는 모두 북쪽 지역의 옛 전거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까닭이다.”
이범윤도 숙종 당시 조선의 굴종적 태도가 작금의 다툼을 초래했음을 탓하고 있다. 간도는 줄곧 5만여 호의 한민족이 집단 거주해 왔으나 1905년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맺어 중국에 이양했다(『순종실록』 1909.11.8). 만주 철도부설권과 간도 영유권을 교환해 버린 것이다. 기존의 한민족은 계속 거주할 수 있게 됐지만 청의 법을 따라야 했다.
일본에 병합당한 1910년 이후에도 간도는 계속 민족의 가슴속에 우리 영토로 남아 김좌진·지청천·홍범도 등이 이곳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 암살 거사를 앞두고 사격 연습을 한 곳도 이곳 용정이었다. 1962년 2월 18일 북한은 중국과 국경을 확정했다. 천지 가운데로 국경선이 그어지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이 북한의 영토가 됐다. 이로써 간도가 우리 영토 밖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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