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감성 그리고 개성의 대학로
서울대 캠퍼스 있던 사잇길, 문화거리路
부모 세대 낭만적 데이트 장소路
가난한 배우 꿈 키우던 인큐베이터路
성대 앞 길목 가성비 식당 천국
낙산공원 ‘뷰 맛집’, 도시 속 자연 속으路
대학로는 ‘대학교 거리’란 뜻이다. 서울 대학로는 당시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캠퍼스가 있던 연건동, 동숭동 사잇길을 의미했다. 성균관대도 대학로에서 멀지 않다. 성균관은 고려·조선시대 최고의 국립대학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로’라는 이름을 딱 한 곳만 허락해야 한다면 혜화역에 있는 대학로를 이길 곳은 없다. 서울대가 지금의 관악구로 옮겨지면서 대학로는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이화동 사거리로 이어지는 1㎞ 남짓의 대로와 골목은 크고 작은 공연이 오르고, 내린다. 어머니·아버지 세대의 가장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였고, 가난한 배우들의 꿈이 영그는 미래 스타들의 인큐베이터였다. 지금 한국 문화가 세계를 흔들고 있다. 미국엔 브로드웨이, 영국엔 웨스트엔드가 있다면 한국엔 대학로가 있다.
명문대생 거리, 연극의 거리
혜화동에 있는 경신고를 나왔다. 학교에서 대학로까지 20분 거리였지만, 대학로가 정확히 어디인지 몰랐다. 당시엔 학교와 집만 오가는 게 세상의 전부였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주 대학로를 찾았다. 1990년대 대학생들은 신촌과 대학로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갔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학로엔 조선총독부 의원(지금의 서울대 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설립 당시 의과대학이 꼭 있어야 했다. 총독부 의원이 있는 연건동에 의과대학이 생겼고, 성베네딕트수도회의 동숭동 부지 8만2645㎡(약 2만5000평)를 매입해 법학부 캠퍼스로 활용했다. 광복 이후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로 바뀐 뒤 마로니에공원 주변에 문리대·법대·미술대 캠퍼스가 자리 잡게 된다. 관악구로 옮기기 전까지 대학로는 서울대 학생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명문대생 거리였다.
서울대가 이전하면서 대학로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다. 1981년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개관을 시작으로 신촌·명동 등지에 흩어져 있던 소극장들이 대학로로 대거 이동하게 된다.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해 서울대 이전으로 생긴 빈 공간에 문화시설이 빠르게 채워졌다. 샘터 파랑새 극장, 바탕골소극장 등 수많은 소극장이 문을 열며 ‘연극의 거리’로서 입지를 굳힌다.
이젠 세계적인 뮤지컬 성지
옛 서울대 캠퍼스 부지에 마로니에공원이 조성되면서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자유로운 거리공연의 성지로 불리게 된다. 스케이트보드를 능숙하게 타는 젊은이들도 마로니에공원에 가면 항상 볼 수 있었다. 1980년대는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대학로는 여러 대학이 연합해 집회와 시위를 벌이던 학생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신고 재학 시절, 최루탄 냄새가 너무 심해 한여름에도 창문을 못 열었던 기억이 난다.
정부가 1985년부터 대학로를 문화예술공간으로 적극 육성하면서 문화시설이 확충되고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개최되는 곳으로 자리매김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뮤지컬 장르가 본격 성장하면서 소극장 뮤지컬 위주로 부흥기를 맞는다. 뮤지컬계의 아카데미상인 토니상을 6개나 거머쥔 한국 창작뮤지컬 ‘어쩌다 해피엔딩’ 역시 대학로에서 초연했다. 300석의 소극장에서 펼쳐진 ‘어쩌다 해피엔딩’은 초연 때부터 반응이 좋았다. 공연을 본 이들의 입소문과 재관람이 이어지면서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마침내 세계적인 뮤지컬상을 6개나 받는 쾌거를 이루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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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공연에 매료된 외국인 관광객들
혜화역 사거리에서 뻗어 나간 대로는 북쪽 성북동·성균관대, 동쪽 이화동 벽화마을까지 이어진다. 20대 커플들을 위한 ‘데이트 맛집’이 주를 이루는데, 혜화역과 마로니에공원 주변 파스타집만 70곳이 넘는다. 챗GPT 유료 버전이 분석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상권은 파스타·피자→브런치카페→수제 맥주→떡볶이 분식→비건식당 순이다.
‘디마떼오’ 피자는 1990년대 이미 유명했다. 당시엔 희귀했던 화덕으로 굽는 피자로 대박을 터트린, 코미디언 이원승이 운영하는 피자가게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25년 이상 운영되는 피자집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오랜만에 방문한 대학로에서 ‘디마떼오’ 피자를 발견하니 옛 생각이 절로 났다.
300석 미만 소극장은 300곳에서 150여 곳으로 줄었지만 ‘시즌 레퍼토리’ 방식으로 회전율을 높여 흑자를 유지하는 곳이 많다. 평일엔 대학생·직장 초년생이, 주말엔 30·40대 뮤지컬 덕후 원정대가 대학로를 접수한다.
최근 눈에 띄게 달라진 변화로는 외국 관객의 폭발적 증가를 들 수 있다. 자막 서비스 덕에 일본 도쿄·대만 타이베이 팬클럽 투어가 단체로 좌석을 쓸어 간다. 요즘엔 좌우에 LED 모니터를 설치한다든지 앞자리 등받이 모니터로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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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와는 확연히 다른 성균관대 앞
혜화역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400m, 성균관대 정문 앞 길목은 ‘9000원’으로 배를 채우는 학생들의 밥집들이 있다. 성균관대 정문 앞 1.2㎞ 구간은 저렴한 식당, 노포, 한옥카페가 줄줄이 이어진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지하 ‘은행골식당’은 삼계탕이 1만1000원, 덮밥·라멘이 5000원대여서 가성비 식당 투어를 즐기기에 딱이다. 떡볶이·순대·김밥 3종을 1만 원 한 장으로 해결하는 ‘둘리네 분식’, 9000원 팟타이가 주력 메뉴인 ‘아시안 테이블’까지 가성비 식당들의 천국이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북동 방면으로 방향을 틀면 1970년대로 순간이동이 가능하다. 버스기사들의 전설 같은 단골집 ‘쌍다리 돼지불백’(1970)은 연탄불 불백·낙지볶음·조갯국 3종 세트로 밥 두 공기는 게 눈 감추듯 비울 수 있다.
맞은편 ‘국시집’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집답게 한우 사태·양지를 푹 고은 육수에 얇은 면을 넣어 ‘칼국수→수육→문어숙회’로 이어지는 풀코스를 즐길 수 있다. 문인 이태준의 가옥을 개조한 한옥 찻집 ‘수연산방’에서 마당의 매화 향을 곁들인 팥빙수나 유자차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면 서울 구도심 힐링 투어가 완성된다. 언덕을 내려오다가 45년 노포 ‘혜화칼국수’에서 부른 배를 문지르며 들어갈까 말까 고민한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고 본다. 과식은 삼가야지만, 부들부들한 면발에 중독성 갑인 국물까지 비우면 도파민이 끝도 없이 분출된다.
산책의 기쁨 창경궁, 벽화와 전망 맛집 이화동
혜화역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10분만 걸어 내려가면 만나는 창경궁은 ‘왕실 정원+놀이공원’이라는 극과 극의 재미를 준다. 1483년 성종이 어머니·할머니를 위해 지은 궁궐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엔 동물원·식물원·유원지가 들어서면서 창경원으로 격하됐다. 1960~1980년대엔 지금의 롯데월드·에버랜드 같은 ‘최고의 놀이공원’으로 사랑받았다. 1984년 동물원과 식물원이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했고, 1987년 서울랜드가 그 자리에 들어서면서 본격 복원이 시작됐다.
은행나무와 대온실을 낀 산책로는 계절마다 벚꽃·단풍이 폭죽처럼 터지고, 월·화요일를 제외하고 매일 밤 9시까지 ‘도심 속 달빛 산책’이 가능하다. 창덕궁 후원·종묘로 이어지는 한적한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울 한복판에서 유배하러 온 듯한 고요가 기분 좋게 여행자를 감싼다.
창경궁 서편 홍화문을 나와 대학로 굿즈숍을 지나 낙산공원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5분 남짓. 실제로는 이화동 벽화마을까지 10~15분, 거기서 성곽길을 타고 정상까지 10분 정도 더 소요된다. 혜화역 2번 출구→마로니에공원 앞 KFC 골목을 따라 오르막만 꾸준히 걸으면 성곽길 표지판이 나타난다. 더 여유를 원하면 혜화역 4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종로 03번(또는 성곽 순환버스)을 타고 ‘낙산공원 입구’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정상 부근엔 ‘서울 뷰 맛집’이라는 수식어를 독차지한 카페가 몰려 있다. 성곽 바로 옆 카페 ‘개뿔’은 2층 테라스에서 남산타워와 을지로 빌딩숲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벽화마을 입구의 카페 ‘트레블’은 큰 통창 너머로 노을이 스크린처럼 넘어간다.
도시는 시끌벅적하다? 발품을 팔면 도시의 고요와 도시 속의 자연을 품을 수 있다. 낙산공원은 전 세계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한데, ‘마침내 이곳에 왔다’ 감격하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보는 것 역시 또 다른 재미다.
나에게 일상인 곳이 누군가에겐 더없이 특별하고 소중하다. 대학로 주변이 이제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급부상 중이다. 어깨 좀 으쓱하며 걸어도 된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이라면 마음껏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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