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으로 화가가 된 박수근(1914~1965)의 그림에는 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나무가 그려진 작품의 제목으로 나무, 골목 안, 마을 풍경, 나무와 여인, 나무와 두 여인, 두 나무와 두 여인, 나무와 사람들, 휴식, 길, 강변, 귀가, 고목과 여인, 귀로, 나무 아래, 목련, 꽃피는 시절 등이 있다. 나무와 여인, 나무와 두 여인 등의 그림은 같은 제목으로 여러 점을 그렸다. 나무가 들어가지 않는 제목의 그림에도 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박수근의 나무는 독특하다. 나무에 이파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의 옷차림이나 길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 등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겨울나무를 그린 것도 아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박수근은 자신의 브랜드라고 할 만한 독특한 질감을 화면에 구사했다. 1960년을 전후해 미술평론가 석도륜과 함께 경북 경주에 드나들면서 토기와 와당을 수집하고, 이를 탁본으로 제작하며 그의 그림에 질감이 더 두터워졌다. 오늘날 우리가 박수근 하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마저 다 덮어 버릴 정도의 극단적인 두께의 질감은 이 무렵 완성됐다.
화면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색채 또한 무채색 일색이어서 어쩌다 나무 이파리를 그렸다고 해도 초록색이 무채색에 묻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파리가 보이지도 않는다. 목련 같은 경우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맺히기 때문에 화면에 아예 이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흐리게 처리한 흰색의 꽃과 나뭇가지로만 구성된 무채색의 화면이다.
그의 그림에 나무가 자주 나오는 걸 보면 박수근은 나무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우리나라는 수목이 지금처럼 울창하지 않았다. 온통 헐벗은 산이었다. 사람들도 헐벗은 산처럼 가난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는 가난한 자연이 보인다. 이파리가 달린 나무보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가 더 잘 보인다. 가난한 마음을 담은 박수근의 시선도 그러했다.
마을마다 큰 느티나무 하나쯤은 있었다. 그늘을 찾아 사람들이 느티나무 밑으로 몰렸다. 나무 아래가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고 놀이터였다. 가난한 이들은 느티나무 그늘에 모여 하루 종일 멍한 시간을 보냈다. 박수근은 그 시절의 풍경을 기막히게 포착했다. 가난, 나무 그늘의 공간, 욕망이 휘발된 무료한 시간 등은 우리 어른들이 앞서 살아온 세월을 담담한 색채와 거친 질감으로 절묘하게 묘사했다.
도상봉(1902~1977)의 나무는 박수근과 전혀 다르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엘리트 화가 도상봉은 성균관대 근처에서 살았다. 라일락, 개나리 등을 묘사한 정물화를 주로 그렸지만, 집 근처 비원과 성균관대 명륜당을 그린 풍경화도 많이 남겼다. 도상봉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는 형태가 매우 구체적이고 색채는 건강하다.
명륜당의 은행나무와 창덕궁 후원 숲속 나무들은 조선시대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던 것이다. 마을의 느티나무와는 대접이 다르다. 관리가 잘돼 때깔이 좋은 고급스러운 나무들이다. 그런 나무는 당연히 윤택한 색채를 뿜어낸다.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나무는 아니지만, 이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온 나무들이다.
나무는 사람보다 오래 산다. 나무의 기억은 사람의 일생이 담을 수 없는 오랜 시간을 담고 있다. 나무를 그린다는 건 우리의 오랜 역사를 그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사는 나무는 신령스럽다. 박수근과 도상봉의 그림에서 나무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흐른다. 팔월의 더위에도 지칠 줄 모르는 나무를 보면 더욱 그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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