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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독립운동 8월의 6·25전쟁영웅

입력 2025. 07. 31   16:13
업데이트 2025. 07. 3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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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지면.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지면.


8월의 독립운동 일장기 말소사건
민족의식 고양…한국 언론 저항 상징 사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동메달
동아·조선중앙일보 검열 피해 삭제

국가보훈부(보훈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 손 선수 유니폼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일장기 말소사건’을 ‘8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심을 달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이어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도 허가했다. 그러나 기사 내용은 사전 검열 체제 아래 둬 수정·삭제가 가능하도록 관리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 확전으로 일본 군국주의화가 가속화하자 조선총독부의 언론 통제도 더욱 까다로워지고 엄격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나란히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내는 낭보가 전해진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두 조선인 청년의 활약을 식민치하에서 민족적 자긍심과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최대의 쾌거로 평가하며, 연일 보도했다.


1936년 8월 13일 자 조선중앙일보 지면.
1936년 8월 13일 자 조선중앙일보 지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모습을 그린 펜화.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모습을 그린 펜화.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그 과정에서 조선중앙일보는 8월 13일 자 기사에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실으면서 손기정과 남승룡의 유니폼에 있던 일장기를 삭제했다. 당시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처음에는 일제 검열관이 일장기의 의도적 삭제를 파악하지 못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가 보도한 사진에서도 일장기 표식이 흐릿하게 보이도록 수정됐다. 

이후 동아일보 8월 25일 자 석간에서 손기정 선수 유니폼의 일장기를 완전히 삭제한 사진이 게재됐다. 이 사건은 일본 검열 당국의 주의를 끌었고, 당일 일본 경찰은 동아일보의 발매 및 배포를 금지시키고, 관련자 다수를 연행해 취조했다. 그리고 8월 28일, 동아일보는 10개월간 정간됐다. 조선중앙일보도 9월 4일 보도를 끝으로 자진 휴간하면서 결국 폐간됐다.

이 사건은 단순히 언론 탄압을 넘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한국 언론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례로 기록됐다. 또한 식민지 시기 일제의 언론 통제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드러내며, 민족 언론들이 맞서 싸워야 했던 정치적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이 사건은 민족적 자각을 불러일으켰고,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출한 언론인들의 목소리였다. 아울러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의 강압적 통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다. 

 

 

‘8월의 6·25전쟁영웅’ 이운산 중령. 유족 제공
‘8월의 6·25전쟁영웅’ 이운산 중령. 유족 제공


8월의 6·25전쟁영웅 이운산 육군 중령
동부전선 북한군 공격 지연 반격 기반 마련
전쟁 발발하자 홍천지역서 적 격퇴
충주·수안보·문경 등서 치열한 전투

같은 날 보훈부는 6·25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남침하는 북한군 공격을 지연시켜 국군의 반격 기반을 마련한 이운산(1917~1950) 육군 중령을 ‘8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중령은 1948년 8월 9일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 장교 후보생으로 입교해 약 2개월간 교육훈련을 수료한 후, 같은 해 10월 12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국군 6사단 2연대 3대대장으로 강원 인제군 현리 북쪽에서 38선 경계 임무를 수행하며 현리, 홍천지역에서 북한군을 저지·격퇴했다. 이후 7월 말까지 충주·수안보·문경·함창 일대에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12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연대가 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8월 3일, 6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이동해 용기동~교안동~307고지를 연결하는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나 다음 날부터 북한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지연전을 펼치며 약 40㎞ 후방으로 철수했다.

열흘 뒤인 13일, 교통 요충지인 경북 군위군 우보면 일대에 도착한 이 중령은 청로동 북쪽의 무명고지와 175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어 지속된 적의 공격 속에서도 공세적 방어작전을 전개하며 진지를 끝까지 사수했다. 이후 324고지 방어 임무를 수행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다.

26일에는 북한군이 203고지 일대를 포격과 함께 대대적으로 공격해 오면서 연대 전체가 붕괴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 중령은 대대 병력을 우보역 부근 강둑에 재배치하고, 철수 중인 1대대를 엄호하며 적을 상대로 기습공격을 감행, 연대를 위기로부터 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적의 반격이 거세지자 3대대는 지연작전을 펼치면서 후방으로 철수하던 중 주변에 매설된 지뢰가 폭발하면서 이 중령을 포함한 7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정부는 이 중령의 숭고한 희생과 공훈을 기려 1950년 12월 30일, 소령에서 중령으로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노성수 기자/사진=보훈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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