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이슈돋보기
트럼프 2.0 시대의 유럽 자강론 ③ 독자적 핵 억제력 구축을 위한 역내 주요국의 접근법
독자적 핵 억제력 예부터 지속적 거론
트럼프 유럽 방위 축소 행보에 재부상
올해 초 독일 총리 ‘핵 공유’ 논의 제안
프랑스, 핵 강화계획 발표 등 환영 의사
영·프, 이달 핵 전력 사용 조율 첫 합의
유럽 재무장 로드맵과 통합 발전 과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면서 국제사회의 우려가 제기됐다. 러시아와 담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럽 동맹국을 사실상 배제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종전 구상이 가시화되면서 나토 동맹국의 안보 우려가 고조됐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의 점령지를 협상 대상에서 배제하면서 불법적 침공을 사실상 용인해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질서를 주도해 온 미국 대외정책 기조의 전면적 부정으로 해석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 핵 확장억제 공약의 유럽 내 의구심도 고조됐다. 현재 나토의 핵 공유체계는 네덜란드·독일·벨기에·이탈리아·튀르키예 등 유럽 5개 동맹국에 배치된 미국의 B61 계열 핵중력폭탄과 투발수단인 동맹국의 ‘이중용도 전투기(DCA)’ 등으로 구성됐다. 배치된 핵무기 사용은 핵기획그룹(NPG)의 만장일치 및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의 핵 사용 승인에 따라 결정된다.
핵폭탄 활성화는 미국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즉 미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의 최종결정권을 보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친러시아 행보와 함께 유럽 방위의 책임을 축소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미국 핵 확장억제 공약에 대한 유럽 동맹국들의 의구심 고조를 초래했다.
미국 핵 확장억제 공약에 관한 의구심은 냉전기 나토 출범 이후 유럽 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이슈다. 특히 프랑스는 1950년대부터 확장억제 공약의 신뢰성에 의구심을 제기하면서 1960년 핵실험을 거쳐 독자적인 핵 억제력을 구축했다. 또한 1966년 나토 탈퇴를 계기로 NPG에 참여하는 대신 핵전략의 자율성 확보 원칙을 고수했다.
반면 영국은 1952년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이 된 이후에도 자국의 핵전력을 미국과의 양자 관계 및 나토 집단안보체제와 밀접히 연계시키는 행보를 보여 줬다.
동시에 프랑스와 영국 모두 핵 개발 초기부터 자국의 핵 능력이 개별적인 국가 이익 차원을 넘어 유럽 차원의 억제 효과를 발휘한다는 관점을 견지했다. 나토 역시 1974년 오타와 선언 때 양국의 핵 능력이 대서양동맹 차원의 안보를 뒷받침하고 있음을 공식 확인했다. 이는 유럽 차원의 독자적인 핵 억제력을 구축한다는 논리가 이미 냉전기에 태동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975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비준하는 과정에서도 유럽의 독자적인 핵 억제력 구축이 가능하다는 시각이 확인됐다.
탈냉전기 유럽의 독자적인 핵 억제력 구축 논의 역시 프랑스와 영국 주도로 전개됐다. 예를 들어 1995년 양국이 체결한 핵협력 공동성명에는 한 국가의 핵심 이익에 관한 위협이 양국 모두에 위협임을 확인하면서 핵보유국으로서 공조의지를 강조했다.
이어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서명을 앞둔 1996년 1월 마지막 핵실험을 단행하는 과정에서는 유럽 파트너국들과 핵 억제 논의를 진행할 준비가 돼 있음을 공식화했다.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 역시 1996년 파리 육군사관학교 연설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핵협력이 참여를 희망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개방돼 있다고 강조하면서 협력의 확장 가능성을 시사했다.
마찬가지로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은 2020년 2월 파리 군사학교 연설 때 프랑스의 핵 억제력을 지역안보 차원에서 어떻게 사용할지 유럽 국가들과 전략적 대화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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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독자적인 핵 억제력 구축 담론은 트럼프 재집권을 계기로 재부상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지난 2월 조기총선 유세 과정에서 유럽의 핵무기 보유국인 영국·프랑스의 핵 공유 혹은 핵 방위 적용 가능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유럽 자체의 핵 억제력 구축 논의에 소극적이었던 기존 방침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탈냉전기 유럽의 안보 위협이 감소함에 따라 독일 내 배치된 미국 전술핵이 대거 철수하는 등 핵 기반의 억제전략이 축소 조정됐다. 하지만 2014년 크림반도 합병사태를 계기로 러시아의 핵 강압에 대응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독일은 나토 핵 공유체계를 통한 미국 확장억제를 기반으로 억제력 강화에 착수했다. 반면 미국과의 관계에 부담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유럽 차원의 핵 억제력 구축 논의에는 소극적 모습을 보여 줬다. 이에 메르츠 독일 총리의 제안은 확장억제의 유럽화에 대한 독일의 전략적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으로 해석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3월 5일 대국민 연설에서 독일의 제안을 환영하면서 “유럽의 동맹국 보호를 위한 핵 억제력에 관해 전략적 대화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달 18일에는 프랑스의 핵무기 강화계획을 공개했다. 나토의 공중방어에서 핵심 기지 역할을 담당해 온 프랑스 북동부의 뤽세유 생소베르 공군기지를 핵 억제력 프로그램의 주축 역할을 담당할 장소로 변모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이 기지를 현대화하는 동시에 핵미사일 운용이 가능한 차세대 라팔전투기 40대를 2035년까지 추가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럽 차원의 확장억제력 구축을 위한 프랑스의 노력이 성공하려면 국내 반대를 극복해야 한다. 극우진영을 주도해 온 국민연합(RN)이 프랑스의 핵 억제력은 프랑스를 위해서만 사용돼야 한다며 반대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역시 마크롱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을 대립적 언사로 비판하면서 자국에 가하는 위협으로 규정했다. 프랑스의 핵전력이 미국의 핵우산을 대체하기에 역부족이라며 평가 절하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비판 속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이달 양국 핵전력 사용 조율에 사상 최초로 합의했다. 러시아의 위협이 해소되지 못한 가운데 미국의 안보 공약이 약해지면서 유럽의 안보 우려가 고조되자 유사시를 고려한 양국의 핵 대응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영국은 “이번 합의가 양국의 핵 억제력이 사상 처음으로 독립적이면서도 조율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고 평가하면서 “영국이나 프랑스의 핵심 이익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은 양국 핵전력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국제사회는 이번 양국의 합의가 유럽지역 전체 핵 확장억제 제공의 출발점이 될지에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는 양국 합의를 “우리의 동맹과 적대세력 모두를 향한 메시지”로 규정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핵 대응 협력을 바탕으로 유럽지역 안보를 위한 확장억제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러한 독자적 핵 억제력 구축 노력이 성공하려면 유럽 재무장 로드맵과의 통합적 발전이 필수적이다. 미국 확장억제 기제와의 상호보완적 발전도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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