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카르타고 유적지 - 로마의 지중해 세계 제패를 웅변하다
튀니지 북부 카르타고, 로마와 120년간 세 차례 충돌
코끼리 부대 한니발, 한때 로마 심장부까지 쳐들어가
3차전서 시민·병사, 비르사언덕에 모여 ‘최후의 항전’
전함 220척 수용 가능한 군항, 로마식 상업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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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바르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의 심장부를 겨눈 사나이! 서양 고대 세계에서 알렉산드로스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군사 영웅이다.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십중팔구 함께 언급되는 것이 바로 칸나에전투(BC 216)다.
이 전투에서 그는 양익(兩翼) 포위 전술의 진수를 보여주며 공화정 로마군을 섬멸했다. 이때 한니발이 이끈 병력이 바로 도시국가 카르타고 군대였다. 당시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기에 로마의 성장 과정에서 결코 공존할 수 없는 타도 대상이었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벗어나 지중해 세계로 뻗어가는 데 최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바로 포에니전쟁(BC 264~146)을 말한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공화정 로마와 도시국가 카르타고가 지중해 제해권을 두고 벌인 일련의 충돌을 통상 포에니전쟁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튀니지 북부에 있던 카르타고는 당시 지중해 서부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무역 국가였다. 원래 페니키아(현재 레바논) 출신 정착민이 BC 9세기경 개척한 식민도시로 출발해 이후 스페인, 북아프리카, 사르데냐, 그리고 시칠리아 일부를 장악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이에 비해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에서 점차 세력을 키우고 있던 육군 중심의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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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은 무려 약 120년 동안 총 세 차례에 걸쳐 충돌했다. 특히 제2차 전쟁(BC 218~202)에서는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이 로마 본토까지 침공하며 위협했지만, 최종적으로 패망한 쪽은 카르타고였다. BC 146년 제3차 대결에서 패전해 로마군에게 철저히 파괴당한 끝에 도시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카르타고를 점령한 로마군은 도시 성벽을 허물고 시가지 전체를 파괴한 것도 모자라 땅에 소금까지 뿌렸다고 한다. 긴 전쟁의 결과 지중해 세계의 주도권은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넘어갔다.
하지만 한 인간집단이 남긴 삶과 문화의 생명력은 의외로 끈질기다.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었어도 로마는 카르타고의 흔적을 영원히 지울 수 없었다. 철저하게 부서진 틈새로 일부 유적이 남아 말없이 카르타고의 찬란했던 영화와 함락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웅변해 주고 있다.
더구나 이후 역사 속에서 카르타고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포에니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카이사르의 지시로 카르타고가 재건돼 다시 북아프리카의 ‘보석’으로 떠올랐다. 로마제국 북아프리카 속주의 수도이자 행정·상업·종교 중심지로 성장했다. 다양한 시설과 건물들이 신축되고, 특히 기독교 전파 초기에는 북아프리카 교회의 모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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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고대 로마 도시 카르타고에는 어떠한 유적들이 남아 있을까? 통칭해 ‘카르타고 유적지’는 수도 튀니스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15㎞ 떨어진 베르사 반도와 인근 해안 지대에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직접 포에니전쟁과 관련된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다.
먼저 카르타고 도시 중심에 있는 해발 약 70m의 완만한 둔덕 비르사언덕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은 제3차 포에니전쟁(BC 149~146) 당시 카르타고의 병사와 시민들이 로마군에 대항해 최후 항전을 벌인 장소다. 대체로 도시 전체 지형이 평탄하다 보니 이곳은 마치 높게 솟아오른 천연 요새처럼 느껴진다. 도시 전체와 특히 군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애초부터 이곳은 카르타고 심장부로 자리잡았다. 당연히 비르사언덕을 중심으로 정치 및 행정 관청, 유력 귀족의 거주지, 신전과 종교시설,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등 중요한 건축물이 집중적으로 들어찼다. 따라서 이곳이 항전의 최후 보루가 될 것은 필연적이었다.
제2차 포에니전쟁 승리 후 카르타고의 재흥(再興) 가능성을 두려워한 로마는 BC 149년 약체로 변한 카르타고를 상대로 전면전에 돌입했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 지휘 아래 로마군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카르타고를 포위한 채 공성전을 벌였다. 마침내 BC 146년 도시 외곽 성벽을 돌파하고 내부로 진입한 로마군을 상대로 약 6일 동안 최후 시가전이 벌어졌다. 로마군에 밀린 채 끝까지 살아남은 시민과 병사들은 마지막으로 비르사언덕에 집결해 결사 항전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언덕을 둘러친 성벽마저 무너지면서 전투 7일 차에 5만 명에 달한 생존자들은 올리브 가지를 흔들며 로마군에 항복했다. 일부는 잔혹하게 학살당하고, 나머지 생존자 대부분은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이처럼 카르타고 최후 항전 장소라는 역사적 의미와 화려했던 한 문명의 종말이라는 슬픔을 간직한 채 비르사 언덕 주위에 있는 유적들은 지금도 그 처연함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은 카르타고 항구다. 당시 이곳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한 설비를 갖춘 상업항이자 군항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곳은 카르타고 해상력과 군사력의 핵심으로 전쟁 당시 함대의 기지 역할을 했다. 조감도에 따르면 항구는 크게 두 파트로 구성돼 있었다. 우선 직접 바다에 면한 입구 쪽에는 직사각형 형태로 민용 선박이 금속, 곡물, 직물 등 수출입 화물을 싣고 내릴 수 있는 상업용 항구를 설치했다. 이곳 주변으로 물품 보관 창고, 조선소 및 선박 수리소 등이 있다. 항구에 개설한 물류 창고와 세관 시설에서 무역세를 걷고 입출항 등 항해 및 교역 관련 기록을 관리했다.
무엇보다 항구 안쪽으로 원형 석조 구조의 인공 항구를 조성해 군항으로 삼았다. 바다와 직접 면하고 있는 상업항이 개방된 구조인 데 비해 안쪽에 있는 군항은 제한된 진입로에다가 바다 쪽에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아 보안에 유리했다. 원형의 항구 중앙에는 지휘 본부가 위치한 작은 섬이 있었다. 원형 주위로는 최대 220여 척의 전함(주로 삼단노선)을 수용할 수 있는 석조 돔 형태의 정박 공간을 설치했다. 공간 위층에는 수병 숙소, 군수품 보관 창고, 무기고 및 정비소 등을 뒀다.
고대 세계에서 이 정도의 복합 군항 시스템을 갖춘 도시는 거의 없었다. 항구의 정비소는 막강한 카르타고 해군 전력을 지탱한 핵심 인프라였다. 포에니전쟁 패배로 폐쇄됐다가 이후 로마식 상업항으로 재건됐으나 군항의 기능은 영영 회복하지 못했다.
튀니지 고대도시 카르타고의 로마 시대 유적지는 이미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먼 옛날 로마와 자웅을 겨뤘던 도시국가 카르타고의 독창적인 군사 및 상업 시설이 깃든 항구 유적을 비롯해 로마 시대 극장, 공중목욕탕, 신전 등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카르타고는 원래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였기에 로마와 페니키아 유산이 공존하는 이곳은 고대 지중해 문명의 교차로로서 먼 옛날 강성했던 카르타고의 영광을 간직한 채 세계인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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