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돈을 초월한 화상 정기용

입력 2025. 07. 22   15:10
업데이트 2025. 07. 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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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한 달 전, 부고가 날아왔다. 화상 정기용(1932~2025)의 죽음이었다. 이 땅에 수많은 화상이 나고 죽었지만 정기용은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다.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파를 키운 화상으로 파리의 칸바일러(1884~1979)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1968년 프랑스에 68학생운동이 있었고, 이 무렵 태어난 미술이 ‘쉬포르 쉬르파스’다. 대표작가로 클로드 비알라(1936~ ), 피에르 뷔라글리오(1939~ ) 등이 있다.

칸바일러가 입체파를 이끌었듯, 화상 장 푸르니에(1922~2006)가 쉬포르 쉬르파스를 이끌었다. 쉬포르 쉬르파스는 지지체(쉬포르)와 표면(쉬르파스)을 작업의 주제로 삼은 실험적인 미술이었다. 장 푸르니에와 쉬포르 쉬르파스의 화가들은 정기용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 1980년대가 되니 서울에 쉬포르 쉬르파스 작가들의 전시가 이어졌다. 전시는 정기용이 운영하던 원화랑을 비롯해 현대화랑, 한국미술관 등에서 열렸다.

당시 최첨단 미술이었던 쉬포르 쉬르파스의 전시가 선구적인 도시 도쿄에서 안 열리고 서울에서 열린 건 신기한 일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한국은 세계의 변방이었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프랑스의 실험적인 미술이 서울에 소개되고, 또 화가들과 화상이 서울을 즐겨 찾아온 건 정기용의 개인기 덕분이었다.

정기용은 인천 출신이다. 고교생 때 이미 고미술의 컬렉터였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사원으로 뉴욕 출장을 갈 때마다 김환기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김환기를 통해 현대미술의 정수를 이해하게 됐다. 김환기에게 감화받은 정기용은 인사동에 10평 남짓 공간의 작은 화랑을 열었다. 뉴욕의 김환기 작품을 처음으로 서울의 아트마켓에 연결한 주인공이 정기용이었다.

1983년 파리, 화가 김창렬의 아파트에서 백남준, 정기용, 박명자, 화가 정상화 등이 모였다.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 등이 참여하는 세계 최초의 위성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자금 부족을 백남준이 호소했다. 정기용이 세 사람의 판화 제작에 선금을 내 자금난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실시간으로 뉴욕, 파리, 한국 등지에서 방영됐다. 세계를 호령하는 아티스트가 한국인 백남준이라는 데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국내 미술 전문가도, 일반인도 백남준을 비로소 처음 알게 됐다. 1984년 2월, 백남준을 비롯한 이들의 판화 3인전이 원화랑에서 열렸다. 백남준의 미술작품이 국내에 전시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 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조차 컬렉션이 빈약했다. 해외 유명작가 작품 구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국으로 들여와야 할 멋진 해외작품이 있으면 정기용은 집을 몇 채 팔아서라도 사 왔다. 어떤 작품은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통이 컸다.

그런 정기용이지만 자가용이 없어 버스표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서울 시내를 주로 걸어 다녔다. 도시의 산책자, 보들레르풍의 플라뇌르였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의기투합의 말동무를 만나면 내려야 할 역을 몇 개나 지나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곤 했다. 이발은 아침이면 인사동 골목에 나타나는 이동이발관을 이용했다. 시멘트 담벼락에 못을 박고 거기다가 거울을 걸고 의자를 놓으면 이발관이 됐다. 일반 이발관에서 3000원 할 때 여기선 1000원으로 해결됐다.

호사와 검약을 자유롭게 오간 돈 씀씀이였다. 돈을 초월하고 산 화상 정기용,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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