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백년전쟁의 서막과 존 던스터블의 음악
프랑스 왕위계승 놓고 벌어진 전쟁
실제론 잉글랜드와 영토·패권 다퉈
헨리5세 아쟁쿠르서 이기며 왕위 차지
전투 승리 축하 행사 사용 위해 작곡
4성부로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 연출
십자군 전쟁의 소용돌이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발생해 무려 116년 넘게 지속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두 왕국뿐만 아니라 동맹국까지 끌어들임으로써 유럽 사회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그동안 군인은 일종의 특권을 지닌 귀족 자제나 기사계급 중심이었는데, 백년전쟁을 거치며 평민도 군대의 일원이 됐다. 그러면서 국가 의식과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반면 중세 봉건제의 대표적 용병 그룹인 기사계급은 급격히 쇠퇴기를 맞게 됐다.
백년전쟁이 프랑스 왕위 계승을 놓고 벌인 전쟁으로 알려졌지만 그건 명목이고, 실제로는 영토 문제와 패권을 다툰 전쟁이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잉글랜드 왕조 소유의 영토가 많았고, 잉글랜드에서 백작이나 공작이 임명돼 영주로서 다스렸다. 이들 영주는 잉글랜드가 임명했지만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역은 노르만족이 점령했다. 1066년 잉글랜드를 침략해 앵글로색슨 왕조를 무너뜨리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잉글랜드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1294~1328)는 아들 없이 죽음을 앞두자 부왕 필리프 4세의 형제인 샤를(샤를 드 발루아) 백작의 아들 필리프 6세(1293~1350)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졌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1312~1377)와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1295~1358)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이사벨라가 죽은 샤를 4세의 여동생으로, 당시 에드워드 3세의 부왕인 에드워드 2세(1284~1327)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선제공격으로 주도권을 잡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가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옹립하자 이를 묵시적으로 용인해 몇 년간 조용히 지냈다. 그런데 필리프 6세가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지인 아키텐을 무단 점유했고, 노르망디 해안에 함대를 보내 위협을 가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은밀히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면서 잉글랜드를 견제하도록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를 다시 꺼내 들었고 프랑스 공격 준비에 착수했다. 백년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백년전쟁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전투는 프랑스 북부 칼레 남쪽의 크레시전투와 중서부에서 발생한 푸아티에전투, 그리고 북부에서의 아쟁쿠르전투다. 1337년 개전 이후 1340년 에드워드 3세는 북부 브뤼주에 있는 슬뢰이스항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해 대승을 거둠으로써 제해권을 갖게 됐다. 이로써 프랑스의 잉글랜드 본토 공격이 제한되면서 백년전쟁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에서 벌어지게 됐다.
그중에서도 크레시전투는 전쟁 초기인 1346년 8월 26일 일어났는데, 잉글랜드군이 절반밖에 안 되는 군대로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투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군이 석궁(활)과 중기병(중무장한 말을 탄 기사)을 주력으로 하는 것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장궁(長弓)을 단련시켰다.
석궁이 분당 3~5발을 쏜다면 장궁은 10~20발을 쏘고, 더 멀리 쏘도록 했다. 또한 중기병이 말을 타고 돌진하는 것에 대비해 이동로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이동이 지연되면 장궁을 쏴 격퇴했다. 기사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뚫지 못할 때는 말을 쏴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아무리 강한 중기병 기사라도 말이 없으면 무거운 갑옷을 입고 기동이 거의 불가능했는데, 이런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크레시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적은 병력에도 대승을 거뒀다. 여세를 몰아 북부의 해안 도시 칼레를 점령,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칼레’에서의 포위전은 훗날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1884년작)의 탄생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영국의 헨리 5세,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다!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Edward the Black Prince·1330~1376)가 이끄는 군대가 이번에는 프랑스 남부를 공격했다. 아키텐을 중심으로 북으로 이동하며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당시 프랑스는 필리프 6세가 죽고 장 2세(Jean II·1319~1364)가 왕위에 올랐다.
1356년 흑태자 군대는 푸아티에전투에서 똑같이 장궁병을 활용한 전술로 장 2세의 군대를 대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초기에는 잉글랜드군이 일방적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칼레·아키텐 지역, 노르망디 등 프랑스 서부 중요지역을 확보했다. 포로로 잡힌 장 2세는 끝까지 포로 석방보상금을 지불하지 않고 런던에서 숨졌다.
1364년 즉위한 샤를 5세는 아키텐 지역 귀족들을 선동해 잉글랜드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됐고, 1369년 흑태자의 동생이 프랑스 남부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프랑스가 분전했다. 해전에서도 동맹군을 동원해 이김으로써 잉글랜드에 빼앗겼던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했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가 파벌 간 정쟁이 심화한 틈을 타 1415년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아쟁쿠르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여세를 몰아 프랑스 북부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그 결과 1420년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고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한다는 내용의 트루아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샤를 6세의 왕세자와 추종 세력들은 여전히 헨리 5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 중남부에 거점을 확보하면서 항전을 계속했다. 결국 프랑스의 샤를 6세 왕조가 벼랑 끝에 몰리며 마지막 저항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쟁쿠르전투 승리를 축하하는 ‘성령이여 오소서/ 창조주여 오소서’
영국의 작곡가 존 던스터블(1385~1453)은 헨리 5세의 ‘아쟁쿠르전투’ 승리를 축하하는 의식 행사에 쓰일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당시 영국 사령관 베드포드 공작 밑에서 일하면서 사령관이 프랑스에 갔을 때 프랑스로 건너가 산 적도 있었다.
1416년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열린 헨리 5세의 전투 승리 축하 행사를 위해 ‘성령이여 오소서/ 창조주여 오소서(Veni Sancte Spiritus/ Veni Creator Spiritus)’라는 곡을 만들었는데, 4성부의 곡으로 1416년 처음 연주됐다.
4성부란 네 개의 성부가 각기 다른 박자로 노래하는 것이다. 장엄하고 신성한 행사를 감안해 웅장한 분위기가 연출되도록 작곡함으로써 행사를 더욱 빛냈다. 무반주곡이지만 악기의 빈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고딕 건축물의 아치처럼 견고한 화성으로 이뤄져 있다. 고요한 듯하면서도 맑게 퍼져나가는 화성은 마치 신의 목소리로 착각하게 만들며, 5분이 넘는 연주 내내 쉼 없이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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