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 돋보기
트럼프 2.0 시대의 유럽 자강론 ② 유럽 재무장 로드맵과 추진 방향
안보 담보 위한 7대 핵심 분야 식별
국방예산 증액 위해 재정 준칙 유예
결속 기금의 국방 분야 활용도 독려
EU 공동 예산 담보 차관 제공 제시
방위 분야 신규 사업 규제 간소화
|
지난 2월 28일 개최된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백악관 정상회의가 정상 간 설전으로 파행되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잠정 중단했다. 이에 유럽연합(EU) 정상들은 3월 6일 개최된 특별 정상회의를 통해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과 유럽 방위력 강화를 주제로 논의했다. 특히 유럽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절박한 문제 인식에 따라 이 회의 직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공개한 ‘유럽 재무장 계획(Rearm Europe Plan)’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EU 집행위원회는 3월 19일 발표한 ‘대비태세 2030(Readiness 2030)’을 통해 재무장 계획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유럽 자강을 위한 국방백서’로 규정된 이 문건을 통해 EU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전반적·포괄적 차원에서의 전략 환경을 평가한 다음 지역 안보를 담보하기 위한 7대 핵심 방위능력 분야를 식별했다. 대공미사일 방어, 포병 체계, 탄약과 미사일, 드론과 대드론 체계, 군사적 기동성, 인공지능(AI)·양자 및 사이버·전자기전, 전략적 조력능력(enablers)과 핵심 기반시설 보호 등이 그 내용이다. 이러한 필수 능력을 구축하기 위한 유럽 방위산업 혁신, 입법 조치, 그리고 재정 계획 등의 내용도 제시했다.
대비태세 2030의 후속 조치도 가시화됐다. 예를 들어 EU는 유사시 유럽 내 신속한 병력·장비 이동을 가능케 하는 ‘군사용 솅겐(Military Schengen)’을 조성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철도·해상·항공로를 긴급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7대 핵심 능력의 하나인 군사적 기동성 구축을 통해 역내 분산된 전력을 통합 운용하면서 억제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논리다.
3월 26일 채택된 EU의 ‘대비태세 연합 전략(Preparedness Union Strategy)’도 주목되는 내용이다. EU 차원에서 최초로 채택된 이 전략은 전염병 대유행과 재난재해로부터 사이버·하이브리드 공격과 전쟁에 이르는 광범위한 위기 상황에 대비하는 전 사회적 차원의 대비태세 구축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필수 공공 서비스 부문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책 마련, 위험 예측을 위한 조기 경보 시스템 구축, 의약품 등 핵심 물자 비축·관리 등이 추진된다. 현재 회원국별로 분산된 위기 대응 기제를 보완하기 위한 ‘EU 위기 대응 허브’로 신설될 예정이다. 범유럽 차원의 방위태세 구축 로드맵을 제시한 ‘대비태세 2030’의 연장선에서 전시·평시의 통합적 대비태세를 구축하겠다는 EU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럽 재무장 로드맵의 성공 여부는 ‘대비태세 2030’을 통해 제안된 8000억 유로 수준의 재정 동원에 달렸다. 이를 위해서는 EU 회원국의 대대적인 국방비 증액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기존 재정 준칙에 따른 제약 상황 극복이 관건이다. 안정성장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SGP)으로 명명되는 EU의 재정 준칙에 따라 회원국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3%와 60%를 넘으면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은 EU의 재정 건전성을 담보하는 안전장치로 작동해 왔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경기 부양과 우크라이나 지원이 필요해지면서 적용이 일시 중단됐다. 이후 2024년 2월부로 EU는 국방·환경 분야의 투자 여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재정 준칙의 제재 조항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데 합의했다.
그 연장선에서 EU 집행위원회는 ‘대비태세 2030’을 통해 회원국의 대대적인 국방예산 증액이 가능하도록 재정 준칙 적용을 유예하자는 ‘국가별 예외조항(National Escape Clause)’을 발동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회원국별 평균 GDP 1.5%의 국방비 증액이 추진될 경우 6500억 유로 수준의 재정을 담보할 수 있다는 기대치도 제시했다. 이러한 제안에 따라 EU 27개국 중 16개국이 재정 준칙의 예외조항 발동을 요청했으며, 중기재정계획을 제출하지 않은 독일을 제외한 15개국이 승인받았다.
기존 예산을 국방 분야로 재편성하려는 접근법도 주목되는 점이다. 일명 ‘결속 정책(Cohesion Policy)’ 관련 예산인 결속 기금의 국방 분야 활용 독려가 그 내용이다. 이 기금은 7년 단위로 편성되는 EU의 공동 예산 가운데 경제·사회·지역 격차를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개별 회원국에 할당·지원되는 예산이다. 현재 2021~2027년 EU 공동 예산의 3분의 1 수준인 3920억 유로가 결속 기금으로 책정됐으며, 이는 EU 예산 중 가장 비중이 크다.
EU가 추진 중인 개정안에 따르면 회원국은 방위·주거난·탈탄소화 등 ‘전략적 우선순위’로 규정된 분야 투자에 결속 기금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대기업을 포함한 방위산업 생산 역량 강화에 기금을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러한 개정안에 따라 방산 시설 확충, 군사적 기동성 향상을 위한 기반시설 개선, 핵심 기반시설 보호 등의 사업에 집중 투자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U 공동 예산을 무기 구매에 직접 활용하는 것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유럽 재무장 이행을 지원하기 위한 차관 제공 규정도 제시됐다. EU 공동 예산을 담보로 1500억 유로의 차관을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유럽을 위한 안보 행동(Security Action for Europe·SAFE)’으로 명명된 이 규정은 EU 회원국이 제공된 차관을 무기 공동구매에 활용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라 발효일인 올해 5월 29일을 기점으로 6개월 이내에 공동구매 초기 계획을 제출하면 EU 집행위원회의 평가를 거쳐 대출금 지급 여부가 결정된다.
SAFE 규정의 핵심은 ‘유럽산 우선주의(Buy European)’ 원칙이다. 차관을 지원받는 회원국의 공동구매 계약에서 EU 및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권역,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제3국 생산 부품이 전체 구매 비율의 35%를 넘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는 EU 회원국의 무기 공동구매를 유럽 방위산업 기반 강화와 밀접히 연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그 연장선에서 EU는 ‘방위 대비태세 옴니버스(Defense Readiness Omnibus)’로 명명된 국방 분야 규제 간소화 방안을 채택했다. 방위 분야 신규 사업에 대한 패스트트랙 방식의 허가 제도를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EU 집행위원회의 SAFE 규정 초안에 따르면 EU 가입 신청국·후보국과 함께 한국과 같이 EU와 안보·방위 파트너십을 체결한 국가들도 무기 공동구매 참여가 가능하다. 다만 ‘유럽산 우선주의’ 원칙에 따라 실질적 수혜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 상황이다. 우리 방산 수출 전략의 관점에서 이러한 기회와 제약 요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