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와 십자군 전쟁의 ‘아르미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렵 사회 큰 변화
전쟁 소재 다양한 음악 쏟아져
장군 리날도와 연인 알미레나
이슬람 무녀 아르미다 사랑 이야기
유명 작곡가들 오페라로 재탄생
이탈리아 시인 타소의 대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 모티브로 삼아
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하자 노르웨이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등 많은 원정이 뒤를 이었다. 이어 레반트지역에는 예루살렘 왕국과 공국, 백국(백작이 통치)이 세워졌다. 훗날 ‘노르웨이의 쇼팽’이라 불리는 애국적 작곡가 그리그(1843~1907)는 시구르 1세의 노르웨이 십자군 원정을 소재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3개의 소품 ‘십자군 시구르(3 Pieces for Ochestra, Op. 56, Sigurd Jorsalfar)’를 작곡하기도 했다. 시구르 1세 국왕은 당시 19세의 나이로 성공적인 원정을 함으로써 영웅으로 추대됐다.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졌음에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십자군 국가 내 왕위 계승 문제로 갈등이 생겨 크게 약화됐고, 주변 이슬람 세력이 다시 확장해 1144년 가장 약화된 에데사 백국이 결국 이슬람에 점령당했다.
교황은 “1차 십자군 원정의 영광을 재현하고 에데사를 되찾자”며 십자군을 조직했다. 1차 원정 후 약 45년이 지난 1145년, 프랑스 루이 7세(1120~1180)와 독일 콘라트 3세(1093~1152)가 주축이 된 2차 십자군 원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동 중 튀르키예 군대의 공격을 자주 받아 큰 피해를 받았고 간신히 예루살렘까지 도착해 다마스쿠스왕국(지금의 시리아)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했다.
결국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1187년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마저 빼앗겼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시기 이후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점령지가 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 군주 살라흐 앗딘(1137~1193)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이뤄진 3차 원정은 흔히 ‘왕들의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1122~1190), 잉글랜드 리처드 1세(1157~1199), 프랑스 필리프 2세(1165~1223) 등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모만 컸을 뿐 협조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1세가 튀르키예를 지나 작전을 수행하던 중 강에 빠져 죽자 독일 십자군은 돌아가야 했다.
특별히 짚고 넘어갈 십자군 원정은 4차다. 이집트를 공격하려던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을 공격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제때 집결하지 못해 선박 임차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를 변제할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당시 동로마제국에서 폐위된 황제의 아들(이사키오스 2세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이 도움을 청한다. 대가를 지급하겠으니 제위를 되찾게 도와달라는 것.
이에 1203년 6월 24일, 십자군·베네치아 연합군 함대는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마르마라해에 도달했다. 동로마제국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십자군 원정대는 1204년 4월,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렸다. 이 과정에서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이 이뤄졌고, 이때 로마 가톨릭과 동로마 정교회는 완전히 갈라서게 됐다.
1217년에는 이집트를 목표로 한 5차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원정 초기 이집트 북부 해안도시 다미에타를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우기에 카이로로 진격하다가 나일강이 범람해 자멸했다. 이어진 6차 원정에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 2세(1194~1250)와 아이유브 왕조 술탄의 조카가 협상을 벌여 싸우지 않고 예루살렘 일부를 가톨릭 영향권에 두면서 성지순례 신자들을 상호 보호하기도 했다.
7차, 8차 십자군 원정은 프랑스의 루이 9세(1226~1270)가 주도했다. 특히 1248년부터 1254년까지 이집트를 공격한 7차 원정에서는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268년 안티오키아 공국이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해 루이 9세가 다시 원정에 나섰지만 튀니스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교황청은 그가 두 번씩이나 원정에 참여했고, 원정 중 병사한 것을 높이 평가해 ‘성인(聖人)’으로 시성해 그는 ‘성왕(聖王)’으로 불리게 됐다.
9차 원정은 8차 원정에 참여했던 시칠리아의 샤를과 이를 지원하기 위해 뒤늦게 도착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가 합류해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 아크레로 향했다. 키프로스에서 함대를 지원받아 아크레로 향하면서 몇몇 전투에서 이기긴 했으나 술탄 바이바르스(1223~1277)가 키프로스 본토를 공격하자 키프로스 함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크레에 고립된 에드워드 왕자 일행은 악전고투를 펼쳤으나 결국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협정을 맺고 1272년 철수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최종 종결됐다. 1291년에는 십자군 국가였던 예루살렘 왕국마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십자군 원정은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황의 권위가 신장한 측면이 있었으나 한계도 드러났다. 교황청 요청에도 원정을 꺼리는 사례가 속출했고, 승인 없이 동로마제국을 침략하기도 했다. 또한 유럽과 페르시아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 영향력만큼 십자군 원정을 소재로 한 음악도 다수 작곡됐다. 이탈리아 음악가 몬테베르디(1567~1643)는 1638년 ‘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Madrigali guerrieri, et amorosi)’이라는 부제가 붙은 ‘마드리갈’ 8집을 작곡했다. 헨델(1685~1759)도 1711년 초연된 3막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 HWV 7a)’를 작곡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바로 이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다.
‘리날도’는 십자군 원정대의 사령관 고프레도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수하 장군 리날도에게 전투에서 이기면 자신의 딸 알미레나와의 사랑을 허락하겠다고 격려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예루살렘 사라센 왕의 연인이자 마법을 가진 아르미다가 리날도를 유인하기 위해 알미레나를 납치하고 리날도와 고프레도, 그리고 기독교의 마법사 등이 그녀를 구하러 가게 된다.
한편 아르미다의 성에서는 사라센 왕이 납치된 알미레나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부당하고 아르미다 역시 리날도에게 반해 그를 유혹하지만 넘어가지 않는다. 이때 기독교의 마법사와 고프레도가 도착해 알미레나를 구출하고 전투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한다는 내용이다.
‘리날도’에 나오는 무녀 아르미다는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오페라에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하이든(1732~1809)은 1784년 3막의 오페라 ‘아르미다(Armida)’를 작곡했고,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1678~1741)도 1718년 초연된 3막의 오페라 ‘이집트 전장의 아르미다(Armida al campo d’Egitto)’를 작곡한 바 있다. 이탈리아의 롯시니(1792~1868)도 1817년 초연된 3막의 오페라 ‘아르미다’를 작곡했다.
이들 작품은 대부분 1581년 출판된 이탈리아의 시인 토르콰토 타소(1544~1595)의 대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Gerusalemme liberata)』을 각색한 오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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