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 이종석, 이젠 현실로 돌아온 만찢남
거창한 영웅 아닌 보통의 직장인
선망 대신 공감 변신이 기대된다
신입 변호사의 과장된 몸짓에 고개를 젓는 이종석의 연기는 과거의 연기와 선을 긋는 모습처럼 비친다.
이제는 좀 더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탁자를 탁 치며 일어나 외치는 신입 변호사를 상대 원고 측 변호사로 자리한 안주형(이종석 분)은 뜨악하게 쳐다본다. 순간 법정이 술렁인다. 그런 과한 리액션은 법정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이어서다. 일어나 앞으로 나와 변호하려는 신입 변호사에게 판사는 타이른다. “앉아서 마이크에 대고 말씀해 주세요.”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또다시 “본 변호인은!”이라고 외치는 신입 변호사에게 판사는 “피고 소송대리인이시죠?”라고 수정해 주고, “증인을 신청합니다”라고 하자 “네, 오늘 돌아가셔서 증인신청서 제출해 주세요”라고 얘기한다.
이 법정 장면은 tvN 토·일 드라마 ‘서초동’이라는 법정드라마의 색깔을 명확히 드러낸다. ‘서초동’은 법정드라마에서 흔히 봤던 과장되고 극적인 법정 대신 현실 버전의 법정을 들고 왔다. 안주형도 초짜 시절엔 그 신입 변호사 같았을 테지만, 지금은 무려 9년 차 ‘어쏘변호사(로펌에 소속된 월급쟁이 변호사)’로 현실에 발을 딱 딛고 있는 모습이다.
서초동 법무법인에 다니는 변호사라면 어딘가 외제차를 탈 것 같고, 사건도 극적인 것을 맡아 처리할 듯하지만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이 작품은 시작부터 선을 긋는다. 대신 안주형은 여느 샐러리맨처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피곤한 직장생활의 하루를 시작한다. 점심시간이 유일한 낙이고, 퇴근 후 간간이 소개팅을 하지만 맘에 드는 짝을 만날 것 같지는 않다. 퇴근 후 동료들과 모여 맥주 한 잔을 하며 수다를 떨고, 가끔은 교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한다. 사건도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그런 거창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말다툼에서 벌어진 폭력사건이나 임대아파트 대출이자 미납사건 같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민사사건이 대부분이다.
이종석이 역할을 맡은 안주형이란 인물은 9년간 ‘어쏘변호사’를 하면서 냉정함을 경험적으로 장착한 변호사다. 그는 의뢰인의 감정에 과하게 몰입하지 않는다. 폭력을 행사했다는 누명을 썼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찾아온 시각장애인의 사례에서도, 그는 장애를 갖고 있다고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여 준다. 대신 그 냉정함으로 앞뒤 정황의 정확한 팩트를 찾아내는 이 인물은 변호사라는 대단한 직업의식이 아니라 시키면 해야 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감정노동에 휘말리지 않으며 일하려 한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현실적인 직장인의 모습을 연기한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그걸 해내는 배우가 이종석이란 사실은 이 사안을 다시금 보게 만든다. 현실감보다 판타지적 인물을 더 많이 연기해 왔던 배우가 아닌가. 비현실적 외모로 ‘W’ 같은 작품에선 만화를 찢고 나온 인물을 연기했던 그였다. ‘학교 2013’으로 대중의 눈도장을 찍은 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맡았던 박수하는 타인의 내면 목소리를 듣는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비현실적 세계를 그린 판타지가 아니라고 해도 그가 연기한 작품은 현실적이라기보다 극적 서사가 강조된 게 다수다. ‘닥터 이방인’의 탈북한 천재의사 박훈, ‘피노키오’의 천재적 기억력을 가진 최달포, ‘빅마우스’의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간 후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는 박창호가 그들이다. 이들 판타지적 캐릭터는 이종석이라는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이미지의 배우를 만나 그 자체로 설득력을 얻은 바 있다.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건 그의 멜로 연기다.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종석의 이미지와 특유의 공감 능력은 어떤 작품이든 상대역과의 기막힌 케미를 만들어 화제가 되곤 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이보영, ‘피노키오’의 박신혜, ‘W’의 한효주,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수지, ‘빅마우스’의 윤아,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이나영이 그들이다. 이 흐름은 판타지를 내려놓고 이제 현실로 돌아온 ‘서초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 배우인 문가영과의 케미가 기대감을 높인다.
전작이었던 ‘빅마우스’에서 이종석이 맡았던 박창호란 인물이 애초 변호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서초동’에서의 안주형과 차이가 느껴진다. ‘서초동’에서 신입 변호사가 보였던 법정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과장된 모습이 ‘빅마우스’의 박창호였기 때문이다. 사실 판타지적 영웅을 선망하던 시대는 조금씩 저물고 있다. 이제 소시민도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대다. 세상의 변화는 몇몇 판타지적 영웅이 만드는 게 아니라 소시민들의 노력이 합해져 일어나는 거라고 여겨진다.
법정드라마 속 변호사가 아닌 생활밀착형 변호사의 모습을 그리는 ‘서초동’이 이종석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되는 건 그래서다. 여전히 변호 일에 진심인 모습을 연기하지만, 법정 바깥으로 나와 평범한 직장인의 면면을 보여 주는 안주형이란 인물을 통해 한때 판타지로 공중부양하던 이종석도 현실의 중력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는 이종석이란 배우가 판타지 주인공의 챕터 하나를 끝내고, 현실 연기로 들어오는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선망보다 공감으로 돌아온 그의 변신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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