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포르타 니그라 -고대 로마 군사도시 트리어의 ‘검은색 성문’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독일지역 핵심 기지 건설
군사·행정·교역 요충지로
직사각형 성벽 사방에 문
갈색 사암으로 만든 북문
세월의 이끼에 검게 변해
獨 가장 오래된 도시 명성
1986년 세계문화유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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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은 군사력에 기초한 정복 국가였다.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제위 117~138)가 국경선을 연이어 구축한 방벽을 중심으로 제국의 국방정책을 전환하기 이전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며 땅을 넓혔다. 점령한 새로운 영토에는 교통 요지에 군사 주둔지를 설치하고, 얼마 후 이를 계획적인 군사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를 거점 삼아 필요할 때마다 주변으로 대소 규모의 원정작전을 펼쳤다. 빠르게 증가하는 도시민 생존에 필수인 물은 발달한 수도교 시스템으로 해결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시의 방위, 즉 안전 유지였다. 점령지 혹은 국경지대에 세운 도시였기에 언제든지 토착민의 산발적 저항과 이민족의 대규모 공격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에워싸는 견고한 성벽 구축이 긴요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건설된 군사도시 전형(典型)이 바로 이번에 살펴볼 독일 서남부 도시 트리어(Trier)와 그곳에 있는 로마시대 유적인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검은 성문)’다.
트리어는 게르만족을 통제할 목적으로 로마가 독일 지역에 세운 도시였다. 로마 역사 전반에 걸쳐 게르만족은 끈끈한 애증 관계에 있었다. 로마가 공화정과 제정 초창기 빠르게 영토를 확장할 시기에 게르만족은 정복 대상이었다. 이후에는 ‘용병’으로서 로마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감당하며 제국의 팽창과 융성에 이바지했다.
로마제국의 수호자 역할을 한 게르만족은 세월이 흐르며 강성해져서 오히려 정복자로 변신해 갔다. 결국에는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존재로서 긴 세월 동안 간접적 통제와 경제적 교류의 대상이었다.
제국 초기에 로마가 게르만족을 굴복시키지 못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서기 9년 독일 중북부 숲 지대에서 벌어진 토이토부르크 전투였다. 바로 이때 로마군의 3개 정예 군단 병력(총 2만여 명)이 게르만 부족연합군을 지휘한 아르미니우스의 교묘한 유인 및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거의 전멸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기원전 1세기 중반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서 본격화된 로마제국의 독일 지역에 대한 정복 전쟁은 치명타를 입게 됐다.
이는 로마제국의 북방 영토 확장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라인강 이동(以東) 지역에 거주한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의 직접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의 패배 이후 로마제국은 라인강을 자연 방어선으로 삼은 채 더는 북동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통칭해서 게르마니아라고 불린 유럽 중북부를 겨냥한 영토 확장을 위해 로마군이 일종의 군단 주둔 총사령부 격으로 건설한 군사도시가 바로 트리어였다. 이미 평정한 라인강 서쪽에서 가장 요충지인 트리어에 굳건한 거점도시를 건설해 이를 발판 삼아 북동쪽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앞에서 언급한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참패하는 통에 기세가 꺾이기는 했으나 이와 상관없이 트리어는 로마제국이 망할 때까지 제국의 북쪽 변경 방어에서 다방면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덕분에 트리어는 『자본론』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출생지라는 사실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명성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기원전 16년 트리어에 군사도시 건설의 첫 삽을 뜬 인물은 로마제국 최초 황제나 다름없던 아우구스투스였다. 그는 제국 확장과 안정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트리어를 독일 지역의 핵심 군사기지로 삼기 위해 계획도시 건설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 로마인들은 군사적 필요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제국 전역 요지에 군사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국경선 방어 및 피정복민 통제 역량을 최적화하려고 했다.
로마제국 시기에 군사도시는 어떠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을까? 단순히 군사적 목적 실현뿐만 아니라 여러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우선, 군단 장병들의 군사 훈련장 및 주둔지 역할을 했다. 군사도시는 제국 국경 방어의 최전방 기지로서 충돌이 발생했을 때 전쟁 승리를 담보하는 중추적 요새였다. 이외에 제국의 점령지 주민을 통제하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특히 평화 시 제국 통치의 근간이 됐다. 주로 교통 요지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인근 지역을 아우르는 상업 및 교역의 허브로 발전했다. 당시 로마는 갈리아(현재 프랑스)와 독일 북서부 지역을 아우르는 넓은 영역을 지배해 트리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과연 트리어의 시가지 모습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고대 로마의 군사도시 건설 방식을 반영한 구조였다. 로마 군사도시의 전형적인 특징인 직사각형 꼴 전체 구도에 격자형 도로망이 도시 골격을 형성했다. 주요 도로는 군사작전에 필요한 신속한 이동을 고려해 직선으로 설계됐다. 군단과 관련된 건물 이외에 공중목욕탕, 원형 경기장, 도시 전체를 감싸는 성벽 등 다양한 공공건물이 들어섰다.
군사도시답게 트리어는 견고한 성벽과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성벽은 보통 석조로 축성됐는데, 중요한 지점에는 탑이나 성문을 설치해 방어 능력을 극대화했다. 성문은 철저하게 통제해 유사시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할 수 있었다. 사각형 형태로 축성된 도시 성벽을 연해서 사방(四方)으로 성벽 출입문을 세웠다.
이들 중 하나가 오늘날까지 마치 도시의 상징처럼 트리어를 지키고 있는 ‘검은 성문’ 포르타 니그라이다. 정확하게는 직사각형 모양의 트리어 방어 성벽에서 도시의 북쪽 입구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원래 갈색 사암 석재로 지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끼 등으로 인해 검게 변색돼 이러한 호칭을 얻게 됐다.
포르타 니그라는 트리어 도시 형성보다 늦은 170년 착공해 180년경 완공됐다. 유사시 도시 방어 및 평시 출입 통제가 주 기능이었다. 로마제국의 전형적인 원형 아치 형태를 지닌 건물로, 4개의 큰 아치문과 여러 개의 작은 아치의 조합으로 설계됐다. 특히 높이 30m, 폭 22m, 전면 길이 37m에 달하는 4층 높이의 성문(원래는 출입구 양쪽으로 성문이 있었음)으로 위압적인 외관을 지녔다. 그 웅장한 규모로 볼 때 당시 트리어가 로마제국의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트리어는 고대 로마 군사도시로 출발해 상업·교역 중심지로 발전한 도시였다. 최초로 아우구스투스가 도시의 초석을 놓은 이래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 제국 후반기에도 갈리아 지방 최고의 도시로 그 명성을 유지했다. 예컨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군단사령관 시절 다른 황위 경쟁자들을 제압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기반을 닦은 곳도 바로 트리어였다.
실제로 트리어에는 그가 거주했던 궁전 터와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 포르타 니그라는 시내 중심에 위치하면서 로마제국 군사도시 건축 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트리어의 고대 유적들은 이미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관리되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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