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 십자군 전쟁과 오페라 ‘롬바르디아인’
1차 십자군 전쟁 속 사랑·용서 그려…복수·개종 등 4막 구성
예루살렘 탈환·승리 담았지만 이면엔 이탈리아 애국심 호소
우리는 일반적으로 중세 시기를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던 5세기부터 약 1000년 후인 르네상스(14~16세기) 시기 이전까지로 정의한다. 이때 1095년부터 200여 년간 이어진 십자군전쟁(1095~1291)과 1337년 시작돼 무려 100년 넘게 진행된 백년전쟁(1337~1453)은 유럽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놨다.
이 중에서 십자군전쟁은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는 동로마제국 황제 요청을 교황이 받아들임에 따라 시작됐다.
1071년 동로마제국은 팽창을 계속해 오던 셀주크제국(현재 튀르키예·이라크·이란을 관할하던 제국)에 크게 패한 뒤 현재의 튀르키예(아나톨리아) 지역을 상실했다. 전쟁으로 재정이 크게 약화됐고, 이민족이 계속 압박해 오자 동로마 황제가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1095년 3월 이탈리아 밀라노 남쪽 피아첸차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이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모집함으로써 전쟁은 시작됐다.
전쟁의 결정에는 이교도들이 637년 점령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고 성지순례 가는 기독교인들을 이교도의 약탈에서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교황의 권위를 강화할 목적도 있었다. 게다가 십자군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재산을 가톨릭에 위탁했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1차 십자군 원정은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됐다. 최소 3만에서 약 8만 명의 원정군이 동로마제국령 유럽을 지나 아나톨리아를 가로지르며 튀르크인들을 격파한 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1차 원정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됐고, 유럽에서 이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여기저기서 후속 원정군이 움직였다. 그중에서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밀라노 대주교의 지휘 아래 1100년 출발해 튀르키예 앙카라 북서부 니코메디아에서 프랑스 동부지역의 부르고뉴 십자군 및 잔여 1차 십자군과 합류했다. 동로마제국의 알렉시오스 황제가 지원한 병력까지 가세한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서부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레몽 백작을 총지휘관으로 해 1101년 5월 출발했다.
1차 십자군의 이동로를 따라 도릴레온(튀르키예 중부)을 지나 앙카라에 이른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시칠리아 왕의 아들)가 튀르키예 동부지역을 다스리던 이교도들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여름인 데다 익숙지 않은 아나톨리아의 건조한 무더위에 노출된 십자군은 금세 지쳐버렸다. 이 상황에서 튀르키예 북부 강그라를 지나 카스타모누를 공격하던 십자군은 룸 술탄국의 클르츠 아르슬란(2대 술탄)의 공격을 받았다. 덥고 지친 데다 군수품 보급도 부실했던 십자군은 1101년 8월 튀르키예 북부 메르시반에서 튀르크 연합군에게 궤멸당하고 말았다.
1843년 이탈리아 왕국의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는 이 롬바르디아 십자군 원정을 주제로 오페라 ‘롬바르디아인(I Lombardi alla prima crociata)’을 작곡했다. 베르디는 ‘나부코(Nabucco)’의 성공 직후 30세에 이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출신 시인 토마소 그로시(1791~1853)의 대서사시를 토대로 테미스토클레 솔레라(1815~1876)가 만든 오페라 대본에 곡을 붙인 이 오페라는 베르디의 두 번째 성공작이 됐다.
이 작품은 ‘복수’ ‘동굴 속의 은자’ ‘개종’ ‘성묘’라는 각각의 부제가 붙은 4막 11장으로 구성돼 있다.
1막은 밀라노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폴코경의 두 아들인 파가노와 아르비노는 비클린다라는 여인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툰다. 동생인 파가노는 형을 죽이고 비클린다를 차지하려다 음모가 발각돼 추방된다. 세월이 흐르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형과 비클린다가 결혼해 지젤다라는 성숙한 딸까지 둔 상황이었다.
롬바르디아 십자군의 지휘자로 임명돼 원정을 준비하던 아르비노는 돌아온 파가노를 용서하고 화해한다. 하지만 비클린다에 대한 사랑이 여전했던 파가노는 이를 친구이자 아르비노의 시종인 피로에게 털어놓고 둘은 또다시 음모를 꾸민다.
어두운 밤, 아르비노의 집에 숨어들어 칼로 무자비하게 그를 살해한 것. 하지만 피 묻은 칼을 들고 비클린다를 납치해 집을 나오려는 순간 파가노는 누군가와 마주치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마주친 인물이 다름 아닌 아르비노였기 때문. 파가노가 죽인 사람은 형이 아닌 아버지였고, 그는 또다시 추방된다.
2막은 이슬람 안티오키아 왕국의 궁에서 시작된다. 포로로 잡혀온 아르비노의 딸 지젤다, 파가노와 함께 추방당해 궁성의 성문을 지키는 피로, 그리고 왕궁 근처 동굴에서 수련하는 은자(파가노)가 등장한다. 안티오키아 왕국에서는 십자군 공격에 대비할 방법을 논의 중이지만, 왕의 아들 오론테는 포로로 잡혀온 지젤다에게 반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겠다고 한다.
한편, 피로는 은자 파가노를 찾아 과거 암살에 가담한 죄를 속죄할 방법을 묻자 파가노는 밤에 십자군이 왔을 때 성문을 열어주면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며 십자군을 기다린다. 마침내 십자군이 안티오키아 왕국에 쳐들어오자 왕궁은 혼란에 빠진다. 아르비노가 지휘하는 십자군이 왕과 아들 오론테를 죽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인근을 배경으로 한 3막에서 죽었다던 오론테는 실은 상처만 입고 롬바르디아인 행렬 속에서 살아남아 있었다. 오론테를 사랑하던 지젤다는 아버지 아르비노 휘하에서 몰래 빠져나와 헤매던 중 오론테를 만나고, 둘은 사랑의 도피를 약속한다.
장면은 바뀌어 요르단의 한 동굴에 지젤다가 전투 중 다친 오론테를 부축해 들어온다. 죽음이 임박한 오론테에게 은자 파가노는 기독교로 개종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며 세례의식을 거행하고 끝내 오론테는 죽음을 맞는다.
마지막 4막에서는 아르비노와 십자군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지젤다는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사막에서 물을 발견해 지친 십자군을 안내한다. 물을 마신 십자군은 승리를 확신하며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 하지만 파가노는 마지막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아르비노의 막사로 들어와 아르비노와 지젤다 앞에서 은자인 자신이 동생임을 밝힌다. 아르비노는 그를 용서하며 부둥켜안고 멀리 예루살렘에 십자군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며 파가노는 숨을 거둔다.
베르디가 이 작품을 작곡할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십자군전쟁의 롬바르디아인을 그리고 있지만, 이면에는 십자군처럼 이탈리아인도 하나로 뭉쳐 통일을 이뤄야 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디의 젊은 시절은 불행했다. 가난해 어렵게 음악을 공부했고, 결혼 후 낳은 딸과 아들은 연이어 죽었으며, 결혼 4년 만에 아내도 병으로 죽었다. 거기다 오페라 공연까지 실패하자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국가적으로도 프랑스 지배를 받다가 그 이후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로 인해 베르디의 마음속엔 애국심과 함께 저항,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롬바르디아인’ 같은 오페라 작곡으로 이어졌다.
1842년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공연한 오페라 ‘나부코’가 대성공을 거둔 후 베르디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참여했고, 1860년에는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1901년 88세의 나이로 숨지기까지 오페라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돈 카를로’ ‘오텔로’ 등 유명한 작품을 작곡했으며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 ‘롬바르디아인’ 역시 오페라 작곡가로서 그의 인생을 빛낸 명작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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