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소’를 꺼낸 바다, 떠나는 소걸음 막았더라면…

입력 2025. 07. 03   15:49
업데이트 2025. 07. 0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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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통영, 이중섭을 품었던 예향

김춘수·유치환·박경리·전혁림…
예술인들과 인연 깊은 ‘한국의 나폴리’
고단한 화가의 가슴에 품었던 ‘소’
따뜻한 환대 속에 연작으로 태어나
통영 떠나 2년 만에 생 마감한 천재
그대로 머물렀다면 피했을 비극일까

 

통영 항남동 강구안 포구 원경. 사진=필자 제공
통영 항남동 강구안 포구 원경. 사진=필자 제공



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를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 도시가 예로부터 예술인의 사랑을 받은 데는 치유적인 자연 성격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사계절이 다 탄성을 자아내지만, 구보가 찾은 4월 초의 풍경도 고혹적이었다. 파르라니 하나의 색을 띠던 바다와 하늘을 비롯해 세병관의 기와 너머로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매화, 파릇하니 물빛이 감도는 남망산의 수목 덕이었다.

‘통영’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삼도수군통제영 영내에 복원된 공방들을 둘러보다 구보는 ‘저들이 통영의 오리지널 아티스트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군복, 모자, 무기, 깃발, 군화, 가구, 초상화 등을 제작하던 공인들은 도제식으로 후계자를 길렀다. 그들의 재능이 통영이라는 도시에 흘러들었을 것이다. 통영이 나전칠기와 소반으로 유명한 배경일 터다.

하늘빛과 바다색이 좋은 데다 장인들이 살아온 도시가 예술가들과 인연이 맺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김춘수, 유치환, 박경리 등 문인과 화가 전혁림, 조각가 심문섭, 칠예가 김성수, 작곡가 윤이상 등이다.

1대향 이중섭(1916~1956)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뛰어난 화가였으나 불우한 삶을 살았다. 구보는 통영 거리에서 천재 화가의 삶을 더듬어 본다. 대향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도쿄문화학원 미술과를 졸업했다. 1940년 졸업하면서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해 협회상을 받은 데 이어 1943년에는 태양상을 받았다. 당시 그는 야수파풍의 조형 세계를 선보였다.

2014년 『이중섭 평전』을 쓴 미술평론가 최열의 조사로는 대향이 소년 시절 접한 서양화가이자 골동품 컬렉터였던 김찬영의 수집품 가운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신비주의와 민족주의 정서를 갖게 됐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사실의 복사가 아닌 마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통영 세병관 공방. 군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작했다. 사진=필자 제공
통영 세병관 공방. 군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작했다. 사진=필자 제공

 

통영 항남동 골목. 사진=필자 제공
통영 항남동 골목. 사진=필자 제공



학생 공모전에 출품한 ‘풍경’ ‘원산시가’로 입선에 올랐다. 대향이 평생에 걸쳐 소를 대표적 소재로 삼은 것도 두 교사의 영향이었다. 한글 자모를 해체해 구성하는 스타일도 임용련 선생에게서 습득했다. 1971년 조정자가 쓴 홍익대 석사 논문에는 “오산고보 시절 그의 기숙사 방은 소를 에스키스한 종이들로 가득 찼고, 그 위에서 잠을 자곤 했다(『이중섭의 생애와 예술』)”는 내용이 나온다. 또 김찬영의 아들로 대향과 평양종로보통학교 동창이고 함께 도쿄에 유학했던 화가 김병기(1916~2022)는 “대향이 오산고보 시절부터 10년간은 소에 미쳐 지냈다”(『한국현대미술 50년사』)고 회고한 바 있다.

1945년 대학 동창생이던 야마모토 마사꼬(1921~2022)와 결혼해 원산에 살며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일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해 공산 치하에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못 하게 되자 북상했다가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 1951년 부산으로 왔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11개월 동안 살고 다시 부산으로 나왔으나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담뱃갑 은박지를 화지로 대용한 시도는 슬프게도 독창적이었다. 그 작품들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돼 있다.

생활고로 유년기의 두 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자 부인과 함께 일본인 수용소에 입소시켰다가 1952년 7월 송환선에 태워 일본으로 보내고 자신은 동가식서가숙으로 지내다가 1953년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이주했다. 유강렬은 함경북도 북청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거쳐 홍익대에서 재직하다 통영으로 피란해 있던 참이었다.

대향은 통영에서 여러 예술가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유치환, 전혁림, 박고석, 김춘수, 김상옥 등이었다. 천재들이었던 시인과 화가는 항남동 골목에서 술잔을 나누며 예술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세계를 넓혀줬다. 대향은 그들과 교유하며 이산의 아픔을 달래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특히 여유가 있던 서양화가 김용주는 구하기 어려운 유화물감을 나눠줘 대향의 창작열을 북돋웠다. ‘흰 소’ ‘붉은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등의 대표작이 이때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 대향은 원산 송도원 들판에서부터 관찰해 가슴에 품었던 소를 화폭으로 끄집어냈다. 그렇게 ‘황소’ ‘흰 소’ ‘들소’ 연작이 태어났다(『이중섭 평전』).

 

1954년 통영 호심다방에서 열린 전시회 당시 이중섭. 이중섭미술관 소장
1954년 통영 호심다방에서 열린 전시회 당시 이중섭. 이중섭미술관 소장



통영에서의 시간은 오랜만에 가져보는 안정이었다.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 기거하며 친구들의 뒷바라지를 받았다. 대향 스스로 말한 바 있다. “참된 애정이 충만할 때 비로소 마음이 밝아진다.” 동피랑에 올라 바다를 화폭에 담고 어스름 무렵에는 중앙동의 다방과 항남동의 술집을 찾았다. 그곳에는 늘 다정한 친구들이 있었다. 대향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곳 강구안 부두에서 상선을 타고 선원 신분으로 일본 히로시마에 건너가 가족과 마지막 상봉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선물이었던 셈이다.

1954년 통영을 떠나 진주·서울·대구 등지를 돌며 전람회를 열었다. 그림값으로 도쿄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낼 요량이었다. 1955년 1월 생애 최초였던 부산 미도파 화랑 전시회에서는 대성황을 이뤘으나 수금에 실패하면서 좌절했다. 1956년 서울로 올라온 대향은 9월 6일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지켜보는 이 없이 쓸쓸히 생을 마쳤다. 사인은 간장염이었다. 병원에서는 ‘무연고자’로 분류해 시신 안치실로 넘겼다(『이중섭 평전』). 이 대목에서 구보는 대향이 통영을 떠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의 곁에 머물렀다면 피해 갈 수 있었을 비극이라 여긴다.

구보는 강구안에 연한 항남동 옛 ‘도깨비골목’을 걸으며 이중섭의 발자취를 좇아본다. 그가 자주 드나들었던 다방과 술집들의 안내판과 그의 이름을 딴 식당이 보인다. 유치환과 김춘수, 고은이 쓴 ‘이중섭’들도 보인다. 대향이 전수생들에게 데생을 가르치며 기거하던 나전칠기양성소 2층 건물은 카페로 변했다. 이중섭의 사진이 박힌 안내판이 건물 입구에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은 시민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헐리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2020년 삼성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대향의 작품들은 서귀포와 서울에만 머물렀을 뿐, 작가의 전성기 산실이었던 이곳 항남동에는 오지 못했다. 통영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아쉬워한다.

구보는 그의 흔적이 담겨 기념관으로 삼을 만한 건물이 존재하고, 통영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자랑스러워하며, 무엇보다 그가 전성기를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남긴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곳에 이중섭기념관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그가 품었던 기억의 총합이 또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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