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기폭제 된 2·8독립선언 일 의회에 청원하던 수십 명은 체포되고 끌려가지 않은 유학생들은 히비야공원서 만세시위 일왕 향해 폭탄 던진 이봉창 의사 훙커우 의거 윤봉길 의사 윤동주 시인·안중근 의사의 흔적… 순국지·기념비로 곳곳에 남아
독립운동은 일본에서도 활발히 전개됐다. 3·1운동 전인 1917년 12월 기준 재일교포는 1만4500여 명으로 추정되며, 노동자와 학생이 다수였다. 이들을 비롯한 일본 내 한인은 각지에서 독립을 외쳤다.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일본 한가운데서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며 독립 열망을 만방에 퍼뜨렸다. 특히 이들이 펼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계기가 됐고, 우리 독립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서현우 기자/사진·도움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9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도쿄 히비야공원.
2·8독립선언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도쿄 2·8독립만세운동지와 독립선언지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선언을 추진했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어 일본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 했지만, 일본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고 60여 명이 체포됐다. 끌려가지 않은 유학생 수십 명은 같은 달 12일 히비야공원에 집결해 만세시위를 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2·8독립선언은 우리의 자주성과 민족정신을 세계에 알리면서 약 한 달 뒤 일어난 3·1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 만세시위를 했던 히비야공원 공회당 앞은 현재 조경이 이뤄져 당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역시 옛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재일본한국YMCA가 2008년 5월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의 지원을 받아 개관한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이 있다. 이곳에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있고,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입단 당시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선서하는 모습.
이봉창 의사의 투탄 의거지. 가운데 건물이 경시청이다.
도쿄 이봉창 의사 의거지·순국지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이듬해 1월 의거를 단행했다. 히로히토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 히로히토를 폭사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우리의 독립을 전 세계에 외친 쾌거였다. 이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해 9월 사형이 선고돼 10월 이치가야형무소(교도소)에서 순국했다.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은 현재 왕궁과 일본 경시청 사이의 도로로 추정된다. 이치가야형무소는 없어지고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도쿄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지
신간회 도쿄지회는 1927년 5월 와세다대 스코트홀에서 창립했다. 신간회는 조선총독 폭압정치 반대투쟁, 동포 추도회, 국치일 항의투쟁 등을 했다. 도쿄 외에 오사카, 교토, 나고야에도 지회를 설치해 활동했다. 특히 1928년 8월 29일 국치일에는 도쿄 신주쿠에서 전단을 살포하며 큰 시위를 벌였다.
윤봉길 의사 유해발굴 현장.
윤봉길 의사 순국지.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의 윤봉길 의사 유해 봉환 모습.
윤봉길 의사 오사카 수감지와 가나자와 순국지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훙커우 의거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일제는 재판에서 사형을 확정하고 폭탄 투척 현장인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공개 처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더욱 자극하고 국제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이송해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의사는 그해 11월 오사카로 옮겨졌고, 12월 가나자와에 있는 일본 자위대 작업장에서 순국했다.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
일제는 1932년 12월 윤봉길 의사 순국 후 가나자와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고 기록했지만, 암장지는 방치돼 있었다. 광복 후 임시정부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 국내 봉환을 추진했다.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이 조직돼 현장으로 향했지만, 현지 관리자가 위치를 알려 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암장지를 찾았다. 쓰레기처리장 부근의 관리사무소 앞 통로였다. 유해발굴 전까지 의사의 유해 위로 사람이 지나도록 방치한 것. 현재 암장지적비는 ‘윤봉길의사암장지보존회’의 주도로 관리되고 있다.
요코하마 ‘학지광’ 인쇄소 터
요코하마에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을 간행한 인쇄소 터가 있다. 1921년 10월 재일유학생 대표조직으로 학우회가 결성돼 1931년 2월까지 존속했다. 학우회 소속 학생들은 학술교류뿐만 아니라 2·8독립선언을 비롯한 일본 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1914년 4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학지광』을 간행했다. 『학지광』은 국내에서도 널리 강독됐고, 민중 계몽을 돕는 역할을 했다. 『학지광』 인쇄소는 관동대지진 때 화재로 소실됐다. 현재 일대는 주택·상가지역이다.
교토 도시샤대 내에 자리한 윤동주 시비.
교토 윤동주 시인 시비
시비는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재학 시절 한글로 시를 짓고, 민족계몽 활동 등을 펼친 항일정신을 기려 1995년 2월 건립됐다.
윤동주는 1943년 귀국하다가 사상범으로 몰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44년 2년형을 선고받고 1945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했다. 그가 졸업한 중국 간도 룽징(龍井)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에도 시비가 세워졌다. 교토의 시비는 도시샤대 역사자료관 분관 옆에 있다. 시비에는 그의 ‘서시’가 적혀 있다.
후쿠오카형무소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선생 등은 1942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민족의식 앙양 및 구체적 운동방침 등에 관한 협의를 거듭했다. 목적은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하고, 민중을 봉기시켜 일거에 독립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또 민족을 문화적으로 계몽해 민족의식을 자각함으로써 독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일제에 발각돼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끝내 그곳에서 순국했다. 옛 후쿠오카형무소 자리에는 후쿠오카구치소가 들어서 있다.
안중근 서비.
미야기 안중근 서비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감옥에서 옥고를 치를 때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에게 건넨 글로 세운 서비(書碑)다. 의사는 1910년 3월 형장으로 가기 직전 지바의 친절에 보답하고자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글을 써 줬다. 지바는 이를 소중히 보관하다가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유족들은 1979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 글을 한국에 반환하기로 하고, 의사의 서비를 원본대로 건립해 그 뜻을 기리기로 했다. 서비는 미야기현 와카야나기정의 다이린지(大林寺)에, 반환된 유묵은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있다.
서울로 압송되는 최익현 선생.
쓰시마 최익현 순국지·순국비
최익현 선생은 조선 철종부터 고종 때까지 충청도 신창현감, 호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에서 체포돼 쓰시마에 유배됐다. 이후 단식으로 결연한 의지를 주장하다가 1907년 1월 쓰시마 경비보병대 감금소에서 순국했다. 순국비는 선생의 유해가 국내 봉환되기 전 잠시 모셨던 인연으로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졌다. 순국비에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두려움 없이…미련도 없이… 일제의 심장부 향해 뜨거운 심장 던졌다
입력
2025.
07.
01
17:00
업데이트
2025.
07.
01
17:25
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 세계 속 독립 운동 거점 ④ 일본
3·1운동 기폭제 된 2·8독립선언 일 의회에 청원하던 수십 명은 체포되고 끌려가지 않은 유학생들은 히비야공원서 만세시위 일왕 향해 폭탄 던진 이봉창 의사 훙커우 의거 윤봉길 의사 윤동주 시인·안중근 의사의 흔적… 순국지·기념비로 곳곳에 남아
독립운동은 일본에서도 활발히 전개됐다. 3·1운동 전인 1917년 12월 기준 재일교포는 1만4500여 명으로 추정되며, 노동자와 학생이 다수였다. 이들을 비롯한 일본 내 한인은 각지에서 독립을 외쳤다.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일본 한가운데서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며 독립 열망을 만방에 퍼뜨렸다. 특히 이들이 펼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계기가 됐고, 우리 독립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서현우 기자/사진·도움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9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도쿄 히비야공원.
2·8독립선언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도쿄 2·8독립만세운동지와 독립선언지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선언을 추진했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어 일본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 했지만, 일본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고 60여 명이 체포됐다. 끌려가지 않은 유학생 수십 명은 같은 달 12일 히비야공원에 집결해 만세시위를 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2·8독립선언은 우리의 자주성과 민족정신을 세계에 알리면서 약 한 달 뒤 일어난 3·1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 만세시위를 했던 히비야공원 공회당 앞은 현재 조경이 이뤄져 당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역시 옛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재일본한국YMCA가 2008년 5월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의 지원을 받아 개관한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이 있다. 이곳에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있고,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입단 당시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선서하는 모습.
이봉창 의사의 투탄 의거지. 가운데 건물이 경시청이다.
도쿄 이봉창 의사 의거지·순국지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이듬해 1월 의거를 단행했다. 히로히토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 히로히토를 폭사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우리의 독립을 전 세계에 외친 쾌거였다. 이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해 9월 사형이 선고돼 10월 이치가야형무소(교도소)에서 순국했다.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은 현재 왕궁과 일본 경시청 사이의 도로로 추정된다. 이치가야형무소는 없어지고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도쿄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지
신간회 도쿄지회는 1927년 5월 와세다대 스코트홀에서 창립했다. 신간회는 조선총독 폭압정치 반대투쟁, 동포 추도회, 국치일 항의투쟁 등을 했다. 도쿄 외에 오사카, 교토, 나고야에도 지회를 설치해 활동했다. 특히 1928년 8월 29일 국치일에는 도쿄 신주쿠에서 전단을 살포하며 큰 시위를 벌였다.
윤봉길 의사 유해발굴 현장.
윤봉길 의사 순국지.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의 윤봉길 의사 유해 봉환 모습.
윤봉길 의사 오사카 수감지와 가나자와 순국지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훙커우 의거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일제는 재판에서 사형을 확정하고 폭탄 투척 현장인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공개 처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더욱 자극하고 국제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이송해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의사는 그해 11월 오사카로 옮겨졌고, 12월 가나자와에 있는 일본 자위대 작업장에서 순국했다.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
일제는 1932년 12월 윤봉길 의사 순국 후 가나자와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고 기록했지만, 암장지는 방치돼 있었다. 광복 후 임시정부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 국내 봉환을 추진했다.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이 조직돼 현장으로 향했지만, 현지 관리자가 위치를 알려 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암장지를 찾았다. 쓰레기처리장 부근의 관리사무소 앞 통로였다. 유해발굴 전까지 의사의 유해 위로 사람이 지나도록 방치한 것. 현재 암장지적비는 ‘윤봉길의사암장지보존회’의 주도로 관리되고 있다.
요코하마 ‘학지광’ 인쇄소 터
요코하마에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을 간행한 인쇄소 터가 있다. 1921년 10월 재일유학생 대표조직으로 학우회가 결성돼 1931년 2월까지 존속했다. 학우회 소속 학생들은 학술교류뿐만 아니라 2·8독립선언을 비롯한 일본 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1914년 4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학지광』을 간행했다. 『학지광』은 국내에서도 널리 강독됐고, 민중 계몽을 돕는 역할을 했다. 『학지광』 인쇄소는 관동대지진 때 화재로 소실됐다. 현재 일대는 주택·상가지역이다.
교토 도시샤대 내에 자리한 윤동주 시비.
교토 윤동주 시인 시비
시비는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재학 시절 한글로 시를 짓고, 민족계몽 활동 등을 펼친 항일정신을 기려 1995년 2월 건립됐다.
윤동주는 1943년 귀국하다가 사상범으로 몰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44년 2년형을 선고받고 1945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했다. 그가 졸업한 중국 간도 룽징(龍井)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에도 시비가 세워졌다. 교토의 시비는 도시샤대 역사자료관 분관 옆에 있다. 시비에는 그의 ‘서시’가 적혀 있다.
후쿠오카형무소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선생 등은 1942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민족의식 앙양 및 구체적 운동방침 등에 관한 협의를 거듭했다. 목적은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하고, 민중을 봉기시켜 일거에 독립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또 민족을 문화적으로 계몽해 민족의식을 자각함으로써 독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일제에 발각돼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끝내 그곳에서 순국했다. 옛 후쿠오카형무소 자리에는 후쿠오카구치소가 들어서 있다.
안중근 서비.
미야기 안중근 서비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감옥에서 옥고를 치를 때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에게 건넨 글로 세운 서비(書碑)다. 의사는 1910년 3월 형장으로 가기 직전 지바의 친절에 보답하고자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글을 써 줬다. 지바는 이를 소중히 보관하다가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유족들은 1979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 글을 한국에 반환하기로 하고, 의사의 서비를 원본대로 건립해 그 뜻을 기리기로 했다. 서비는 미야기현 와카야나기정의 다이린지(大林寺)에, 반환된 유묵은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있다.
서울로 압송되는 최익현 선생.
쓰시마 최익현 순국지·순국비
최익현 선생은 조선 철종부터 고종 때까지 충청도 신창현감, 호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에서 체포돼 쓰시마에 유배됐다. 이후 단식으로 결연한 의지를 주장하다가 1907년 1월 쓰시마 경비보병대 감금소에서 순국했다. 순국비는 선생의 유해가 국내 봉환되기 전 잠시 모셨던 인연으로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졌다. 순국비에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