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in 국방일보 - 1975년 9월 29일 자
6·25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전 세계가 유엔의 깃발 아래 함께 싸웠던 전쟁입니다. 이름도, 위치도 모르던 나라를 위해 수많은 해외 참전용사가 목숨을 바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노병이 된 그들은 자신들이 지켰던 국가의 믿을 수 없는 발전상을 보면서 지나온 과거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전쟁 발발 후 20여 년이 흐른 1975년 9월 26일, 27명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용사가 대한민국을 방문해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한국군 전우와 재회해 잊을 수 없는 전우애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경기 동두천시에서 열린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옛 격전지였던 임진강을 방문했습니다. 전우신문(현 국방일보)은 9월 29일 자 지면에서 관련 내용을 보도하며 이들의 감격적인 재회현장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기사에 의하면 1951년 1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한 벨기에대대는 경북 왜관에서 부대를 정비한 다음 그해 4월 뚝섬지구전투를 시작으로 주로 중공군과 대결했습니다. 특히 금굴산, 마차산전투(경기 연천군), 학당리전투(강원 철원군), 잣골전투(강원 김화군) 등에서 임전무퇴의 강인한 전투력을 보여 줬고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남겼다고 기록합니다.
미 제3사단에 배속돼 활약했던 벨기에대대에는 240여 명의 한국군이 같이 작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대부분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하고 군번도 없었던 20세 안팎의 청소년이었습니다. 원래 임무는 군수 및 행정지원이었지만 전황이 어려워지자 소총를 들고 벨기에 용사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기사는 전쟁 당시 중화기 소대에서 경기관총(LMG) 사수와 부사수로 활약했던 벨기에 참전용사와 한국군 용사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 당시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을 보며 사지에서 생존한 당시를 회상하는 등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한국을 다시 찾은 알베르 크라히 장군은 자신이 지휘하던 한국 장병들의 평가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음 속에서도, 중공군에게 포위됐을 때도, 지형을 몰라 벌판을 헤맬 때도 한국의 젊은 전우들은 침착하게 우리를 안내해 줬다. 당시 한국 전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벨기에대대원은 지금도 그때의 따뜻한 전우애를 잊지 않고 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후 옛 격전지였던 임진강을 다시 찾은 이들은 흐르는 강물에 꽃을 헌화하고 이역 땅에서 유명을 달리한 참전용사들을 위해 묵념을 했습니다.
기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비 비문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됩니다. “자유와 평화의 신념으로 공산군들과 싸우던 벨기에·룩셈부르크 용사들! 448명의 전사상자 이름 위에 하느님의 축복이 계실 것이요!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며 여기에 비를 세운다.”
이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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