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김준희의 클래식 읽기

칠흑 같은 고요에도 찬란한 희망이 산다

입력 2025. 06. 26   16:24
업데이트 2025. 06. 2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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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의 마이클(마음으로 이어주는 클래식) 
<끝>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

청력 완전히 잃은 암울한 시기에 작곡
유일하게 직접 연주 못 한 피아노 협주곡이지만
베토벤 특유의 긴장감·서정성 응축
뛰어난 피아노 독주 기교·위엄있는 분위기
압도적 감동 선사하는 품격있는 클래식

미국 의회 박물관의 베토벤 흉상. 사진=위키백과
미국 의회 박물관의 베토벤 흉상. 사진=위키백과



음악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 중 하나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은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며, 음악적 깊이와 감동을 선사합니다.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가 그를 시대를 초월한 영감의 원천으로 여기고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에는 언제나 내적인 단단함이 있고, 그 울림에는 인간적인 서사와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어, 그의 작품들은 청중을 강렬하게 사로잡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장조, 작품번호 73은 그의 리즈 시절 작품입니다. 물론 귀가 들리지 않는 고통으로 점철된 시련의 시기였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들은 더없는 깊이를 품게 됐고, 마침내 그 침묵의 어둠 속에서 가장 찬란한 선율이 태어났습니다.

‘황제(Emperor)’ 협주곡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1809년부터 1811년에 걸쳐 작곡됐습니다. 베토벤은 이 곡을 당시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 없던 그는 이 협주곡을 직접 연주하지는 못했습니다.

초연은 1811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의 피아노 독주로 이뤄졌고, 이듬해 그의 제자인 카를 체르니는 빈에서 이 곡을 연주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이렇게 ‘황제’ 협주곡은 베토벤의 손을 떠나 제자와 후배 연주자들의 손을 통해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황제’ 협주곡은 베토벤이 직접 무대에 서지 못한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젊은 시절 빈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에 연주자적 감각과 작곡가적 혁신을 모두 담았습니다. 이전까지의 네 곡은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곡만큼은 베토벤은 객석에서, 거의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어둠과 같은 침묵 속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곡에는 베토벤의 피아니즘과 예술혼이 가장 장대하게 응축돼 있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은 총 다섯 곡으로, 각각의 곡은 베토벤 음악의 성격 변화를 반영합니다. 협주곡 제1번 C장조는 고전주의 양식 속에서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밝고 명료한 곡입니다. 특별히 느린 악장에서 베토벤 특유의 서정성이 돋보입니다. 제2번 B♭장조는 작곡된 시기로는 오히려 제1번보다 앞서 있는데, 1악장의 카덴차(cadenza: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의 반주 없이 독주자의 기교와 표현력을 자유롭게 펼치는 즉흥적 성격의 부분)를 직접 작곡하는 등 자신의 연주를 위해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던 곡입니다.

제3번 C단조에 이르러서는 베토벤 특유의 극적인 긴장감이 드러나는데,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작곡돼, 그의 음악적 전환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제4번 G장조는 보다 시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1악장의 고요한 피아노 독주의 도입부, 2악장의 수수께끼 같은 대화체, 그리고 유려한 3악장은 베토벤의 한층 더 깊어진 내면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제5번 ‘황제’ 협주곡은 이러한 모든 전 과정을 집약하고 초월하는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곡의 시작부터 피아노가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며 등장하는 파격적인 구조, 웅장한 스케일과 화려한 색채감, 그리고 위엄 있는 분위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압도적 감동을 선사합니다.

1악장의 힘찬 도입, 2악장의 고요한 아름다움, 3악장의 에너지 넘치는 론도까지, ‘황제’ 협주곡은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어쩌면 서로 다른 두 황제가 서로를 의식하며 긴장과 조화를 이루듯, 곡 전체에 살아 숨쉬는 서사적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이 곡의 1악장은 오케스트라가 E♭장조의 코드를 연주한 뒤 피아노가 곧바로 웅장한 아르페지오로 등장하며 기존 협주곡의 관습을 완전히 뒤흔듭니다. 전통적으로는 오케스트라가 서주를 연주한 뒤 피아노가 등장하는 형식을 따르지만 이 곡에서는 피아노가 전면에 나섭니다. 이 협주곡이 별도의 카덴차가 없는 이유입니다. 이는 피아니스트가 “이야기를 내가 이끌어가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젊은 시절 누구보다 뛰어난 연주로 무대에 올랐던 청년 베토벤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2악장은 천상의 대화처럼 고요하고 정제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현악기의 부드러운 선율 위에 피아노가 한 음 한 음 조심스럽게 내려앉으며 시작되고, 이 정적인 아름다움은 청력을 잃어가던 베토벤이 내면에서 길어 올린 평화와도 닮아 있습니다. 거의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속에서 청중은 음악을 통해 베토벤의 깊은 내면과 조용히 마주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3악장 론도는 그 고요함을 뚫고 터져 나오는 해방의 분출과도 같습니다. 힘차게 전개되는 리듬과 세상을 누비듯 펼쳐지는 피아노의 강렬한 기교, 오케스트라와의 밀도 높은 호흡은 어떤 운명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고뇌, 그에 대한 수용, 그리고 마침내 극복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40분에 달하는 연주 시간과 교향곡에 버금가는 이 곡의 규모는 피아노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의 대등한 예술적 대화의 장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베토벤은 오히려 가장 당당하고 찬란한 목소리로 자신의 피아니즘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최근 국내 한 조사에서는 이 곡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1위로 뽑혔습니다. 관객은 듣고 싶고, 연주자는 무대에 올리고 싶어 하는 곡이 바로 ‘황제’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베토벤의 인기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운명’ 교향곡이나 ‘합창’ 교향곡, ‘월광’ 소나타 등도 시기마다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음악 애호가들이 베토벤이라는 인물의 삶과 예술, 그리고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에 깊이 공감한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황제’ 협주곡은 한 시대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맞닥뜨리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황제’ 협주곡을 통해 시련을 이겨내고 희망을 찾는 모든 이에게 품격 있는 ‘클래식한’ 언어로 응답했습니다.

※ 그동안 ‘김준희의 마이클(마음으로 이어주는 클래식)’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필자 김준희는 연주와 강연으로 ‘대중의 클래식화’를 꿈꾸는 피아니스트다. 저서로 『클래식 음악 수업』 『클래식, 경계를 넘어』가 있으며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필자 김준희는 연주와 강연으로 ‘대중의 클래식화’를 꿈꾸는 피아니스트다. 저서로 『클래식 음악 수업』 『클래식, 경계를 넘어』가 있으며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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