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328고지, 다부동전투의 아킬레스건
6·25전쟁 초기 국운 좌우 최대 격전지
낙동강 앞에 두고 뺏고 뺏기는 고지전
벌거숭이 바위산 시신 쌓아 참호로 써
참전용사 “나뭇가지에 창자와 살점만”
고지 아래 마을 주민들 지게 부대 활약
매년 8월이면 희생 장병 위령제 지내
안보 체감 ‘호국 성지’ 역할 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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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국군은 기습 남침한 북한 인민군에 밀려 후퇴를 계속하다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그것도 잠시, 인민군이 낙동강을 도하하면서 칠곡에서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졌다. 칠곡이 무너지면 임시수도가 있던 대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상황이어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적화를 막으려 아군은 피 흘리며 싸웠다. 우리는 그 전투를 ‘다부동전투’라고 부른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낸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다부동전투는 328고지를 비롯해 수암산, 유학산, 천평계곡에서의 전투를 아우른다.
328고지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낙동강에서 불과 300m 떨어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적이 강을 건너 침투할 경우 가장 먼저 올라야 하는 고지였다. 지금의 석적읍 반계리와 망정리 일대다. 제2봉인 270고지, 316고지 등 일련의 능선들이 횡격실로 연결돼 있어 고지를 장악하면 후속 도하 전력이 대구와 부산을 향해 진격할 수 있었다. 328고지가 ‘다부동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린 이유다.
피아가 사력을 다해 맞설 수밖에 없는 전선이었다. 적은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연속적으로 이 고지를 공격하며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는 울창한 숲이 아니라 벌거숭이 바위산이었다. 참호를 팔 수 없어 은폐와 엄폐가 불가능했고, 적의 포격에 노출된 채 전투를 벌여야 했다. 현장에서는 시신 위에 자루를 덮고 그 위에 다시 시신을 쌓아 참호를 만들었다. 적은 병력이 2배 이상이었고 화력도 월등했던 데다 전투를 치르며 내려와 전투력이 높아진 상태여서 급조된 방어태세로 임한 국군보다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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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참전용사가 10대의 나이로 이곳에 투입됐다. 기껏해야 M1 소총 사격연습 며칠 한 게 훈련의 전부인 채로 전선에 배치돼 교전이 시작되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병들이 소총 8발을 발사하고 나면 재장전을 못해 이를 돕던 상관이 많이 희생됐다. 탈환전이 계속되면서 사상자가 늘어났다.
신병들의 희생이 컸다. “이 중사님 저 여기 좀 눕겠습니다. 나중에 후퇴하게 되면 좀 깨워주세요. 이래요. 그러면서 제가 파놓은 호에 드러눕는데 그때 달이 상당히 밝았습니다. 그래 드러눕는데 제가 눈물이 나요. 만 15세니 동생 같은 애 아닙니까.” 자신 역시 18세 소년병이었던 이만수(93) 옹은 그때를 회상하며 눈가를 흐렸다.
8월 10일부터 이틀간은 미군이 집중 포격을 가했다. 적이 전멸했다고 생각하고 점령하러 올라가다 적이 기총소사를 비 오듯 퍼부어 15연대 1대대 3중대는 절반 이상이 희생되기도 했다. 고지를 두고 피아가 엎치락뒤치락 계속되자 8월 12일 아군은 특공대를 짜기로 결정한다. 중대장 정점봉 대위가 상부 명령을 전하자 30명이 자원했다. 평안도 태생 김휘진 소위가 인솔을 자처했다. 선발대 10명은 수류탄 두 발씩을 들고 야음을 틈타 적진에 침투해 적 탱크 2대를 파괴하고 3대는 격퇴하는 전과를 올린 후 전원 귀환해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5연대 1대대의 특공대는 생환에 성공했지만 다른 특공대는 대부분 산화했다. 특공대 신화를 만들었던 정 대위는 임종하며 ‘다부동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다. 구보는 물어물어 그의 산소를 찾았다. 묘비에는 당시 전사편찬위원회가 쓴 ‘328고지 아킬레스건 정점봉’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그 아킬레스건을 지켜낸 정 대위의 투쟁을 상기시켜 줬다.
8월 15일 미군 공군기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낙동강 대안의 적 포병부대가 고지전에 나선 아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15연대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 포격으로 1중대장 신현조 중위 등 많은 병사가 숨졌다. “나뭇가지에 잎은 없고 창자와 살점들이 붙어 있었어요”라고 당시 대대장 박형수(93) 옹이 전한다. 아군은 수류탄전을 전개하다 바닥이 나면서 철수했다.
328고지전에는 다부동 사단본부의 행정요원들도 남김없이 차출됐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현재 인원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난전이 이어졌다. 국군1사단의 병력 손실이 가장 큰 곳이었다.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던 328고지는 8월 21일 천평계곡에서 벌어진 탱크전에서 아군이 승리한 데 이어 미군이 공중 폭격을 가하면서 8월 23일 아군의 점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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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고지 바로 아래에는 반계리, 도계리, 망정리 마을이 있어 주민들도 전쟁을 함께 치러야 했다. 집들은 모두 부서지고 마을은 시체로 가득했다. 윤병규(69) 씨가 조부에게서 전해 들은 바로는 포탄을 맞고 날아와 걸린 시체 잔해들이 감나무 가지마다 걸려 있었고, 야산은 유골이 지천이어서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1950~1960년대에는 아이들이 포탄을 갖고 놀다 폭발해 목숨을 잃은 사례도 허다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주민들은 주먹밥과 식수를 고지에 나르며 전투를 도왔다. 지게에 탄약을 지고 나르다 부상자도 후송했다. 이들은 ‘지게 부대’로 불렸다. 이들의 역할은 정규군만큼이나 컸다. 성주에서 부산으로 피란 가던 도중 며칠을 굶다가 ‘지게 메면 밥 준다’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동참했던 7세 소년도 있었다.
그 소년 도용복(82) 씨는 어린 두 동생의 밥을 구하려 주먹밥 한 덩이와 목숨을 등가로 놓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처음 동참을 제안했던 친구 둘은 총을 맞고 숨졌다.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그만두려다 이튿날 다시 지게를 멨다. 도씨는 “밥의 유혹이 그만큼 컸다”고 전쟁의 비애를 회고했다.
주민들은 적이 마을을 점령하면 그때는 또 그들을 위해 지게를 메야 했다. 나중에 이 일을 두고 ‘부역’ 논란이 일면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반목이 생겼다. 이래저래 비극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8월이면 피아를 가리지 않고 희생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낸다. 망정리와 반계리 주민들은 마을이 ‘호국 성지’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배석운 망정리 노인회장은 “다부동전투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안보 체험하기에 이상적인 곳”이라고 힘줘 말한다. 전쟁의 상흔이 깊이 박힌 역사의 현장을 걸으며 국가방위의 중요성을 체감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구보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나간 시간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역사는 그저 공허할 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경술국치, 6·25전쟁 등의 역사는 ‘스스로 지키려 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구보는 금계국이 지천인 낙동강가에 서서 이 강이 꽃이 피는 공간으로 영원하기를 염원한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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