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이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는 방문객이 많다. 필자도 기회가 될 때마다 현충원을 찾는데, 지난해부터는 현충원에서 가까운 목원대까지 방문한다. 그곳에 대한민국을 너무나 사랑한 외국 군인 윌리엄 해밀턴 쇼(한국명 서위렴)의 동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선정됐고, 한미 우호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진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학교를 다니고 미국 웨슬리언대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해군에 입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해 PT-518 소함정의 부함장으로 활약하고 전역했다(함정 운용술이 뛰어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을 함정에 직접 태우고 상륙시키는 역할을 한 장교로 유명했다).
한국말에 능통했던 그는 이후 미 군정청의 요청으로 조선해안경비대사관학교(현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됐다. 유머스러운 강의와 참전 경험을 토대로 항해술을 가르침으로써 생도들에게 인기 있는 교관이었다고 한다.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해군 창설에도 기여했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재입대한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정보장교로 임명돼 인천상륙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울 수복작전에도 자원해 주로 수색활동에 참여했는데 인민군이 민간인으로 위장해 도심지에 출동, 연합작전에 큰 피해를 주자 미 해병들이 조금만 의심스러운 사람이 보이면 사살하는 것을 보고 평양 말씨로 민간인을 가려 냄으로써 많은 시민을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울 녹번리전투(1950년 9월 22일)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의 짧은 삶을 살펴보면서 감명받은 이유는 외국인임에도 자신이 태어난 한국을 모국으로 여기고 재입대해 목숨까지 바친 참군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6·25에 참전하기 위해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 제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이 지금 위태로운데, 이때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평화가 찾아온 뒤 간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떠나겠습니다.” 그는 진정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laydown his life for his friends).”(요15:13)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