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 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 서거
일제 ‘황국신민화 정책’ 탄압 수위 높여
동우회 사건 날조 민족 지도자들 구속
대전 감옥서 석방 28개월 만에 재수감
모진 고문에 건강 악화 병보석 후 입원
동지들에 “일본 패망할 것…인내하길”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일왕 이름 외치고 구국애족의 삶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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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송태산장에 은거
1935년 2월 10일 체포된 지 약 3년 만에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된 도산은 조만식·여운형·주요한 등의 영접을 받으며 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도산은 삼각정에 있는 중앙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친지들과 함께 서울역을 떠나 평양으로 향했다. 26년 만의 귀향이다. 도산의 평양역 도착 장면을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일 오후 2시44분 열차로 평양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본사 평양지국 속보로 전 평양시가에 삽시간에 퍼지자 오후 2시부터 평양역에는 출영(出迎) 인사로 사람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300명의 대성학교 학우회는 미리 준비한 천막을 역 앞에 세우고 마중 나온 인사들이 초조히 기다리는 중에 그를 태운 열차가 평양역에 들어섰다. …출찰구를 나온 도산은 역전에 도열한 4000여 명과 악수를 하기 시작하다가 이것이 도저히 단시간에 끝날 수 없음을 알고 자동차 지붕 위에 올라서서 일반에게 인사말을 했다. ‘26년 만에 고향 땅을 밟고 여러분을 대하니 감개무량합니다. 이룬 일이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보시려고 이처럼 많은 분이 나와주셔서 더욱 황공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무슨 일에든지 낙심하지 말고 나아가서 후일의 성공과 행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일일이 여러분의 손을 잡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우울함과 침통함을 쫓고, 환희와 달관을 찾으려는 심정에서 쏟아지는 박수 소리가 역전광장이 떠나갈 듯이 요란했다.”(동아일보, 1935.2.13. 석간).
도산은 고향의 선영을 참배 후 친지를 방문하고, 순안 안식교병원에서 위장병 치료를 받았다. 2월 18일 용강온천에서 약 10일 동안 정양했다. 3월 11일 상경해 중앙호텔에 머물며 각계 인사를 만나 국내외 상황과 대책을 논의했다. 건강이 회복된 후 전국 각처에서 강연 요청이 왔으나 일제의 방해로 그마저 할 수 없었다. 도산은 다만 전국을 순회하며 그리던 금수강산을 둘러보고, 친지들을 만났다.
도산은 초여름부터 평남 강서군 대보산 송태(松台)에 있는 조신성의 ‘송태정’에 머물며 그녀가 제공한 땅에 13~14평 규모의 한옥을 손수 지었다. 그 집을 ‘송태산장(서벽사)’이라 이름하고, 이듬해 여름에 입주했다. 도산의 거처가 알려지자 전국에서 많은 청년과 지도자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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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월 10일 영면에 들다
1936년 8월 일제는 일본 군부의 실력자이며 전쟁론자인 미나미(南次郞)를 7대 총독으로 파견했다. 대대적인 대륙침략 전쟁을 앞두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고, 한국 민족에 대한 착취와 탄압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일제는 민족 지도자들을 검거하려고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을 날조해 도산을 비롯한 150여 명을 구속했다. 그중 동우회 회원은 약 70명이었다.
앞서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 1923년 평양에 동우구락부가 결성됐다. 1925년 두 단체가 수양동우회로 통합됐으며, 1929년 동우회로 이름을 바꿨다. 동우회는 이광수·박현환·김종덕·김성업·조명식·이제학 등 흥사단원들이 중심이 됐다. 사실상 흥사단의 국내 조직으로, 국내 여건 때문에 수양과 계몽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도산은 1937년 6월 28일 송태산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울로 이송, 종로경찰서에 다시 수감됐다. 대전 감옥에서 석방된 지 28개월 만이다. 동우회 사건 담당은 악명 높은 사이가 형사와 나가사키 검사였다. 이들은 신문 과정에서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도산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의연한 자세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해 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사의 신문 과정에서 도산은 이렇게 답했다. 원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터에 모진 고문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한 도산은 12월 24일 병보석으로 경성제국대학병원(현재의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면회 온 동지들에게 “일본은 자기 힘에 부치는 큰 전쟁을 시작했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해 패망할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라고 위로했다. “낙심 마오!” 이것이 동포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였다. 도산은 명철한 혜안으로 일제의 패망을 짐작하고 있었다.
3월 9일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하고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여러 번 일본 왕의 이름을 외치고 도산이 영원히 잠든 것은 1938년 3월 10일 자정을 막 지난 때였다. 친형 안치호, 생질 김순원과 김려순 부녀, 이선행, 장회근, 이정희 등 6인이 임종을 지켰다.
일제는 도산의 장례식도 금지했다. 삼엄한 통제 속에서 병원 영안실에서 행한 영결식에도 친형 안치호, 누이동생 안신호, 조카딸 안맥결, 평양의 오윤선, 조만식, 김지간(혹은 김동원) 등 6명만 허가받고 참석했다. 영안실 문을 잠그고 조각가 이국전이 ‘데스마스크(dead mask)’를 떴으나 경찰에게 압수당했다(이만근, 『도산 안창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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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이 우리에게 남긴 것
영원한 겨레의 스승 도산 안창호, 그는 참된 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가 평생 강조한 것은 ‘거짓말하지 말자’ ‘단결하자’ 이 두 가지다.
도산은 대성학교 개교식에서 ‘본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스스로 본보기를 보였다. 근면한 근로자의 본보기, 성실한 학생의 본보기, 참된 교육자의 본보기, 올바른 지도자의 본보기, 진실한 정치가의 본보기를 실천으로 보여줬다.
비록 함께 있는 시간은 적었지만, 정직과 사랑으로 3남2녀를 훌륭하게 길러 가정교육의 본보기를 보였다. 모든 면에서 본보기를 보여준 도산의 삶은 그 자체로 성실한 삶의 본보기다. 그래서 도산의 삶 자체가 훌륭한 ‘국민교육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텍스트는 영혼이 맑고 정직한 사람만이 바르게 읽을 수 있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 그동안 ‘광복 80주년, 도산 안창호를 만나다’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기획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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