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나를 잊은 일상에서 우리가 있는 이상으로…
건너지 못한 이 다리에 뜨겁고 진실한 순간만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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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순서대로 오지 않는다. 사랑의 순도는 순서와 상관이 없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사랑 얘기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상 안으로 쑥 들어와버린 사랑. 늦게 와서 더 뜨겁고, 함께할 수 없었기에 더 오래 남은 사랑. 늦게 찾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랑이 덜 진실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이야기는 사랑의 타이밍보다 사랑의 심도를 측정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장면보다 여운으로 기억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1992년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5000만 부 이상 팔린 이 이야기는 1995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14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고, 국내에서는 2017년과 2018년에 이어 올해 7년 만에 세 번째 시즌으로 관객과 재회하고 있다.
이번 삼연에서는 뮤지컬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커플이 무대에 올랐다. 조정은과 박은태. 오래된 뮤지컬 팬이라면 2010년 ‘피맛골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홍랑과 김생으로 맺어졌던 조정은, 박은태 커플. 조정은에게 ‘조 선녀’라는 별명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아침은 오지 않으리’라는 듀엣 넘버로 한국 뮤지컬사에 전설을 새긴 두 사람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위에서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로 다시 만났다. 전설의 2장이 시작된 것이다.
조정은은 김소현과 함께 한국 여자 뮤지컬 배우 중 품격과 우아함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갖고 있는 품격과 우아함은 결이 조금 다르고, 이것이 또 각자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김소현이 태생적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왕족의 품격이라면, 조정은은 어둡고 신비한 빛을 품은 우아함이다. 조명이 들지 않는 숲속에서도 단정히 빛나는 달빛 같은 배우. 옥주현, 김선영 등 여러 프란체스카를 무대에서 봤지만 이번엔 보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이 역은 조정은이 최고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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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은 사랑과 슬픔의 농도를 기가 막히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배우다. 그래서 그의 프란체스카는 삶의 한쪽에 사랑을, 다른 한쪽에 슬픔을 발라 ‘이븐하게’ 구워낸 인물로 표현된다. 프란체스카는 오하이오의 광활한 옥수수밭에 핀 한 송이 백합 같은 존재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인위적인 거리를 두며 살아온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가 단숨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프란체스카. ‘조프란’이 완벽하게 재생했다.
박은태는 갈수록 연기가 단단해진다. 고음에 특화됐던 그의 목소리는 이제 동굴을 항해 대포를 쏘아대는 것처럼 울린다. 다이아몬드 세공사처럼 캐릭터를 정밀하게 깎는다는 느낌이 든다.
2막의 넘버 ‘내게 남은 건 그대(It All Fades Away)’를 부를 때 객석은 숨을 멈추고 만다. 사랑은 남았지만 함께할 수 없다는 현실의 아픔과 외로움이 박은태의 노래 위에 절절히 쌓여간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단 한 번의 순간(One Second and a Million Miles)’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로버트가 프란체스카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하는 장면.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모든 걸 걸겠어”라고 부르짖는 박은태의 절절한 외침과 흔들리는 조정은의 눈빛. 그러나 그녀는 그 손을 잡지 않는다. 떠나는 대신 사랑을 마음에 파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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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에서 프란체스카가 부르는 넘버 ‘날 흔들지 마(Look at Me)’도 좋다. “어쩜 그렇게 잊고 살았을까, 거울을 본 적이 언제였나…”라는 프란체스카는 더 이상 평범한 주부가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여성, 자아를 회복한 사람이다. 그 목소리는 관객들마저 잊고 있던 각자의 이름을 불러낸다.
이 작품을 ‘불륜의 미화’라고 쉽게 판단하는 이들도 있지만,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도식적인 틀에 갇혀 있지 않다. 여기서 사랑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를 통해 잊고 있던 자아와 재회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자신을 기억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최호중(버드), 정의욱(찰리), 홍륜희(마지) 등 조연 배우들도 극의 회전을 탄탄히 받쳐준다. 수다스럽고 참견을 좋아하는, 조금은 귀찮은 이웃 아줌마 마지를 홍륜희가 잘 그렸다.
무대 연출은 따뜻하고 서정적이다. 파스텔톤의 조명, 액자처럼 감싸는 무대 프레임, 시간의 흐름을 담은 슬라이드 영상. 모든 것이 두 사람의 사랑을 조용히 지지한다. 배경이 된 다리는 단순한 무대 장치가 아니라 기억의 구조물이 된다.
이 공연을 보고 나면 괜히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스마트폰 말고 셔터를 꾹 눌러야 하는, 진짜 카메라로 찍는 사진. 누가 말했던가. 기록되지 않은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모든 사랑이 손을 잡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그저 눈을 감고도 떠오르는 이름 하나로 평생을 살아가게 한다. 그해 여름, 아이오와의 다리 위에서 시작된 사랑이 그랬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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