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원’을 꿈꾼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의 지속을 소망한다. 아이는 부모를 바라보며 전능한 보호자를 느끼고, 연인은 서로의 손을 잡으며 끝없는 미래를 약속한다. 좋은 관계가 오래가길 바라는 것은 본능이다. 그래서 어릴 적 친구, 평생의 연인 등 끝까지 함께할 동료를 원한다.
삶은 그 기대를 조용히 어긴다.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생성과 소멸’을 통해 진화한 까닭이다. 생물학은 말한다. “관계는 기능적일 때 지속된다.” 우리의 뇌 역시 영원한 관계보다 유한성에 익숙하다. 도파민은 새로운 파트너를 만났을 때 오히려 활발히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낯선 관계를 탐색하게 하고, 기대와 설렘을 유도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익숙함이 자리 잡으면 도파민의 분비는 줄어든다. 친밀함이 깊어질수록 안정적인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분출하지만, 이마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뇌는 ‘새로운 자극’을 갈망하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때때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뇌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계의 생물들은 짝짓기 철이 끝나면 곧 헤어진다. 그들은 그 시기의 조건과 환경에 맞는 짝을 찾는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시대, 환경, 개인의 성장 단계에 따라 ‘맞는 사람’은 달라진다. 즉, 관계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이다.
우리는 자주 관계의 끝을 실패로 받아들인다. “왜 이렇게 됐을까?” “처음엔 그렇게 좋았는데”라는 탄식은 영원을 전제로 관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본디 관계는 유기체와 같다. 탄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며, 때로는 끝을 맺는다. 그 모든 과정은 의미가 있다. 역사 속에서도 그러했다.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와 브루투스는 처음엔 동지였고, 함께 이상을 꿈꿨지만 권력 앞에서 균열이 시작됐다. 결국 칼날 앞에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절망이 나왔다. 누가 배신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도 한때 서로를 믿었다는 사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를 후원한 스포르차 공작. 위대한 예술과 권력의 만남은 시대를 빛냈지만, 정치적 몰락과 함께 끝을 맺었다. 둘 중 누구도 틀린 건 없었다. 다만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사상적 연대를 이룬 마르크스와 엥겔스조차 말년에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됐다. 한때 뜨거웠던 이상과 연대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조용해졌다. 그건 배신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였다.
이처럼 관계는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변화하고 소멸한다. 우리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때가 되면 흘러간다. 생물학적 삶도 그러하다.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멸된다. 면역세포는 새로운 적을 만나기 위해 이전 관계를 해체한다. 우리는 종종 ‘왜 멀어졌을까’만 생각하며 관계의 끝을 아파한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관계는 우리를 성장시켰고, 웃게 했고, 위로했다. 이별은 그 모든 시간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충분했음을 인정하는 방식일 수 있다.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그것은 냉혹한 현실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표현이다. 끝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지금의 인연을 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다. “관계는 끝나도 함께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하지 않았기에, 그 시간은 더욱 빛난다.” 자연은 말한다. 관계는 ‘지속’보다 ‘순환’이 중요하다고. 인간관계도 다르지 않다. 끝이 있어야 새로운 만남이 가능하고, 그 경험은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끈다. 우리가 지금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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