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스타를 만나다 - 뼛속부터 다른 K팝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넷플릭스 공개 동시에 글로벌 1위
서울 출생 캐나다 감독 매기 강 작품
OST·안무까지 국내 톱 제작진 참여
전통 무기·민화 속 호랑이 등장하고
응원봉·국밥까지…짙게 깔린 K문화
치밀한 묘사·기발한 상상력 바탕
한국 문화의 새 가능성 활짝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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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스타 K팝 걸그룹, 그들에게는 색다른 운명이 있다. 바로 어두운 저승 세계로부터 이승의 영혼을 노리는 악귀들을 퇴마하는 것. 사냥꾼들의 무예는 춤과 노래다. 연예인 할 팔자가 무당 할 팔자라 하지 않던가.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백성의 한을 풀어온 무녀(巫女)들이 오늘날 카리스마 넘치는 퍼포먼스와 화려한 무대 효과, 빼어난 가창으로 중무장한 아이돌 스타가 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반짝이는 음악으로 번쩍이는 칼날을 휘두르며 세계를 호령하는 이들은 K팝 퇴마사, ‘케이팝 데몬 헌터스’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지난 20일 넷플릭스 공개와 동시에 글로벌 시청 1위를 차지했다.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시리즈’를 통해 오늘날 가장 혁신적인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을 맡았다. 감독은 서울에서 태어난 캐나다 국적의 매기 강, 한국계 미국인 작가 모린 구의 남편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크리스 아펠한스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를 경험한 매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크리스가 K팝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겠노라 의기투합한 때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21년이다. 2020년대 BTS와 블랙핑크를 선두로 K팝이 영미권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시기다.
그때만 해도 시류에 편승해 만든 작품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당시 영미권 매체가 K팝을 바라보는 시선은 혼란스러웠다. 거대한 팬덤이 대륙을 넘나들며 전 세계를 폭격하니 다루기는 해야겠는데, 머나먼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수십 년간 즐겨온 문화를 하루아침에 따라잡기란 어려웠다. 잘못된 정보가 난무하고 무감각한 찬사가 쏟아졌다. 한국계 감독의 참여에 안도할 일도 아니었다. 아직도 미국 유학파 감독이 제작한 초록색 쫄쫄이의 김치 전사가 떠오른다. ‘국뽕’과 ‘두유노클럽’은 놀이로만 즐거울 뿐, 작품으로는 부끄러운 일이다.
K팝을 소재로 한 창작이 아예 없진 않았다. 2018년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가 데뷔시킨 가상 걸그룹 K/DA는 걸그룹 아이들의 참여와 더불어 K팝의 요소를 적재적소 활용해 서사를 넓혔다. 2022년 중국계 캐나다 이민자 가정을 다룬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는 K팝 아이돌을 연상케 하는 보이그룹 포타운이 등장한다. 정작 K팝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었을 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던데, 괜찮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다. 정말 ‘제대로’ 만들었다. 향후 K팝, 나아가 한국을 묘사하는 데 교과서로 삼아야 할 작품이다. 치밀한 묘사와 기발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국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힌다.
왜 주인공이 K팝 걸그룹이어야 하는가? 축제를 통해 신과 소통하는 무당의 춤사위는 한반도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즈, 그 멤버 이난영의 자녀와 조카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1호 걸그룹 김시스터즈로 이어진 역사적 사실과 결합해 당위를 확보한다. 블랙핑크, 있지, 에스파 등 당당한 콘셉트의 선배들과 닮은 걸그룹 ‘헌트릭스(HUNTR/X)’는 K팝을 노래하며 한국의 전통 무기 사인검과 월도, 무구(巫具) 신칼을 불러내 악귀들과 싸운다. 당당한 리더 루미, 세련된 메인댄서 리나, 재기발랄한 래퍼 막내 조이가 K팝 아이돌에게 기대하는 모든 판타지를 스크린 위로 펼쳐 보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헌트릭스를 무너트리고 인간들의 영혼을 빼앗아야 하는 저승 세력의 대응도 재미있다. 악의 축 ‘귀마’는 세뇌된 저승사자 다섯 명을 모아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를 결성한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방탄소년단, 스트레이 키즈와 같은 오늘날 K팝 남자 아이돌의 전형에 청량 달콤한 ‘소다 팝’을 노래하는 5인조 밴드는 뛰어난 비주얼과 매너로 순식간에 헌트릭스의 인기를 위협하며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균열을 낸다. 화려한 액션 장면과 노래의 조화가 마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결합해 폭넓은 감상을 의도하는 ‘비주얼 앨범’을 연상케 한다.
작품의 K팝 묘사는 집요하다. 팬들이 직접 소개하는 멤버들의 매력부터 응원봉 문화, 조직적인 팬덤의 움직임과 음악 방송 및 예능 프로그램까지 K팝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한 결과가 틀림없다. ‘하우 잇츠 던’ ‘소다 팝’ ‘골든’ 등 이 영화의 주제가는 로제와 미야오, 올데이 프로젝트가 소속된 프로듀서 테디의 더블랙레이블이 담당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은 노랫말, 정점의 순간에서 환하게 빛나는 일렉트로닉 기반의 댄스 팝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K팝의 공식을 투영한다. ‘우린 결점과 두려움을 꼭꼭 숨겨야 하지만’이라는 선대의 가르침 아래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서사에선 수없는 인내와 고난을 견뎌야 하는 K팝 제작 과정의 아픔이 묻어난다. ‘마음을 줬으니 영혼을 가져갈게’라는 사자 보이즈의 노래는 보이그룹의 흔한 문법을 극에 맞춰 훌륭하게 비틀었다. 안무 역시 같은 소속사의 K팝 대표 안무가 리정의 손에서 탄생했다.
한국에 관한 표현은 감탄이 나올 정도다. 산이 많은 도시 서울을 정확히 묘사했으며, 하이라이트 신은 남산서울타워다. 무대 전 김밥과 라면 등 분식으로 탄수화물 폭식을 벌이는 헌트릭스 멤버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수저 아래 휴지를 깔고 국밥을 먹고 몸이 아프면 비밀리에 한의원에 간다. 하이라이트는 호랑이다. 오래도록 민간에서 산신령의 시종으로 받아들여진 호랑이가 한국 민화 ‘작호도(鵲虎圖)’ 속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영험한 까치와 함께 루미와 사자 보이즈의 리더 진우 사이를 이어준다. 벌써 인형 제작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극은 마지막까지 한국의 전통에 집중한다. ‘다 쳐부숴서 귀마랑 같이 영원히 고통받게 하고 싶어!’라는 증오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오래도록 우리는 귀신을 쫓아버리거나 죽이지 않고 맺힘을 풀어 고통을 덜어줬다. 퇴마(退魔) 대신 해원(解寃)이다. 악과 깡, 한이 낳은 음악이 더 넓은 세계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미 그러고 있고,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다. 잊고 있던 K팝의 감동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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