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여의도, 양 치는 모래섬이던 곳
조선시대 왕실 가축 방목하던 목장
일제~광복 후 민간·군 공항으로 기능
1968년 여의도 개발 프로젝트 본격화
밤섬·선유봉 부순 골재로 제방 만들어
시범아파트 성공으로 입주자 몰려들어
시인 구상이 살던 곳 ‘강가에서’ 배경
조선 초 여의도는 ‘목양(牧羊)’이라고 표기했다. 왕실에서 사용할 소, 돼지, 염소, 양 등을 방목한 데 따른 이름이었다. 양은 명나라에서 갖고 온 것이었다. 세종 1년 8월에 명 황제가 사신 황엄 편에 양 1052마리를 즉위 선물로 내리자 왕이 각 관사에 나눠 기르게 했다(『세종실록』 1년 8월 24일). 이 양들은 모두 목양(여의도)에서 길렀다.
옛 지도나 실록을 보면 목양은 이후 여화도, 여도, 여울리 등으로도 표기되다 여의도로 정착됐다. 여의도(汝矣島)는 한자 풀이를 하면 ‘너도 섬이냐’는 뜻을 품는다. 구보는 여의도가 원래 영등포에서 반도처럼 튀어나온 지역이었다가 일제가 샛강을 만들어 수로를 넓히면서 떨어져 나가 섬이 된 유래로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유추한다.
현재 국회의사당이 들어선 야트막한 양말산을 모래밭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어서 홍수 때는 산봉우리만 남긴 채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16년 10월 모래섬에 동서로 활주로를 내고 격납고를 둔 간이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여의도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때는 단순히 군용기가 뜨고 내리는 기능만 수행했다. 1920년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 페라린 대위가 최초로 랜딩(landing)을 했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도 1922년 이곳에서 시범비행을 보였다.
홍수 때면 물에 잠겨 버리는 탓에 악조건의 비행장이었지만 서울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비행장은 일본과 조선, 만주를 잇는 노선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1929년 승객이 이용할 수 있는 공항의 규모를 갖추며 경성공항이 됐다.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이 공항에 내렸다. 해방 후인 1947년에는 미국 노스웨스트 항공이 미니애폴리스~서울 노선을 취항했고, 1952년에는 대만 민항공운공사가 타이베이~서울 노선을 열었다. 1947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C-47 수송기 편으로 이곳에 내렸다. 그 기종은 현재 여의도 공원에 전시돼 있다.
1954년에는 미군 위문 공연 차 영화배우 매릴린 먼로가 이곳으로 입국했다. 1953년 국제공항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민간항공 기능은 1958년 1월 김포공항으로 옮겨졌다. 그 후로는 1949년 10월 1일 창설된 공군의 비행단으로 역할을 하다가 공군이 1971년 2월 성남 서울공항으로 이전하면서 여의도공항은 폐쇄됐다(『서울기록원』).
여의도는 1968년에 이르러 대변신을 시도한다. 여의도개발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인근의 밤섬과 선유봉을 부숴 여의도를 확장하는 프로젝트였다. 흙을 쌓아 섬을 넓히고 높였다. 둘레에는 돌로 옹벽을 쌓아 제방을 만들었다. 일제가 만든 샛강을 도로 메워 여의도를 영등포에 붙이는 방안도 논의했으나 범람을 우려해 접었다.
결국 밤섬을 부수고 주변 모래밭을 물길로 바꾸고, 토사와 잡석을 토목재로 쓴다는 안이 채택됐다. 돌 확보를 위해 선유봉도 파괴함으로써 봉우리가 없어지고 양평동서 분리돼 섬이 됐다.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현옥의 아이디어가 구현된 것이었다. 김 시장은 택지를 팔아 서울시의 재정난도 해결하고 물길을 넓혀 홍수도 막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1970년 마포대교가 놓이고 이듬해 여의도 북쪽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287만㎡(약 87만 평)의 거대한 택지에 12층짜리 아파트 24개 동이 신기루처럼 솟아올랐다. 국내에 처음 생겨난 고층 아파트라 이목을 끌었다. 서울시는 이름을 ‘시범아파트’라 지었다. ‘아름다운 신시가지’를 표방했지만 땅이 팔리지 않자 시범적으로 아파트를 지어 선보이기로 한 데 따른 이름이었다.
생활하기가 불편한 입지였으나 다행히 신식 시설과 현대적 배치가 점수를 얻었다. 엘리베이터와 냉온수 급수, 스팀 난방 등을 갖춘 데다 단지 내에 파출소, 쇼핑센터, 유치원, 초·중·고교 등을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로 자동 진학하게 한 특수학군제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차츰 고학력자와 전문직 종사자를 중심으로 입주자가 모여들었다.
시범아파트가 성공하자 백조, 삼부, 삼익, 공작 등 아파트들이 뒤를 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서는 여의도 주민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구보가 당시 인터뷰한 주부들은 “여의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1975년부터 국회의사당, 전국경제인연합회·증권거래소, KBS·TBC 등 정치·경제·방송을 대표하는 기관들이 곁으로 들어오고 종합병원이 들어선 까닭도 작용했다.
1981년 놓인 원효대교와 1985년 태어난 250m 높이의 63빌딩도 한몫했다. 신동아그룹이 지은 63빌딩은 당시 아시아 최고층으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르는 서울의 랜드마크로 부상했다. 유리창마다 도금해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빛났다. 여의도 주민의 자부심은 더욱 고양됐다. 여의도에는 현재 호텔과 백화점, 금융회사들이 한강의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촘촘히 자리를 메우고 있다. 2008년 서울시 조사로는 대략 1만1000여 가구에 3만2000여 명의 주민이 산다. 유동 인구는 18만 명으로 집계됐다.
1999년 1월 개장한 여의도공원은 여의도의 품격을 더욱 높였다. 조순(1928~2022) 시장 작품이었다. 평양의 김일성광장을 의식해 만들었던 여의도광장 자리였고, 더 전엔 경성공항 공간이었다. 1968년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에는 여의대로 지하에 전시용 벙커 시설도 만들었다. 광장에서는 국군의 날 기념식과 ‘국풍 81’ 같은 행사가 개최되곤 했다.
이곳에 공원이 조성됨에 따라 23만㎡에 걸친 숲이 들어서면서 명소가 됐다. 여의도 둘레를 따라 일주하는 벚꽃길도 생겼다. 구보는 여의도 근무 시절, 이 길에서 시인 구상과 여러 번 조우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는 1974년부터 여의도 주민으로 살았다. 그런 인연으로 63빌딩에서 마포대교까지의 도로에는 ‘구상 시인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강공원에서 그의 시 ‘강가에서’를 만난다.
“강은 과거로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중략)/ 내가 종이배처럼 띄워 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후략)”
구보는 여의도의 역사가 현대 서울의 발전 과정을 집약한다고 생각한다. ‘재배치의 창조’로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종이배처럼 띄워 보낸’ 밤섬과 선유봉의 희생도 기억해야 한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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