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그림 속 사계 - 일요화가가 그린 상상의 숲, 앙리 루소의 ‘꿈’
이브인가, 비너스인가…사자·코끼리 들짐승들과 한데 어우러져
평범한 세관 공무원으로 정식 미술교육 받은 적 없는 늦깎이 화가
파리 밖으로 나가본 적 없지만 동·식물원서 대자연 상상력 키워
매일 반복되는 도시 생활의 지루함, 야생의 낙원을 꿈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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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맞기에 앞서 치러야 할 관문이 있다. 6월의 높은 습도를 견디는 일이다. 공기에 응축된 수증기로 인해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불쾌지수는 높아진다. 시원한 바람은 고사하고 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높은 습도로 피로를 느낄 때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가 1910년 제작한 ‘꿈(The Dream)’이다. 이 작품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정글의 모습을 그린다. 싱싱하고 생명력이 가득한 이 그림의 곳곳에는 느닷없는 존재들이 자리한다. 루소는 어떤 ‘꿈’을 꿨을까.
루소의 ‘꿈’은 가로 3m, 세로 2m에 육박하는 거대한 그림이다. 사람 키보다 큰 캔버스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무성한 식물과 꽃으로 가득하다. 이 그림은 아래, 중간, 위 삼단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가장 아랫단에는 갖가지 식물이 땅에서 솟아 올라 있다. 잎의 길이와 넓이, 모양과 색이 다른 식물이 10여 종에 이른다. 노랑부터 짙은 초록까지 색의 변주를 감각하는 것은 이 작품을 보는 흥미로운 요소다.
중간은 식물과 더불어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꽃의 형태는 비슷하지만 파란색과 살굿빛으로 색상은 다양하다. 왼쪽에 있는 소파 위 누드의 여성은 이 작품을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정글에 난데없이 등장한 이 여인은 르네상스 고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여성 누드 포즈로 그려졌다. 중간 단에 활짝 핀 꽃은 마치 여인의 주위를 감싸는 것처럼 배치돼 있다. 여인의 오른쪽 수풀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두 눈을 부릅뜬 사자와 코끼리, 주황색 뱀의 꼬리가 원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장 윗단에는 키 큰 나무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나무 역시 네댓 종으로 다양하게 포진돼 있고 중간쯤에는 주황색 열매가 매달려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나무 사이에는 각양각색의 새가 자리잡고 있고,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그림 가장 위에 칠해진 푸른 하늘에 뜬 흰 달은 낮인 듯 밤인 듯 시간대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것은 원숭이 아래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다. 그림자에 묻힌 이 사람의 존재는 작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돋운다.
루소는 ‘꿈’ 외에도 20여 점이 넘는 정글 그림을 그렸다. 공통적으로 루소의 작품은 풍요롭고 생명력이 가득한 정글을 소재로 하면서 위, 중간, 아래 삼단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몇몇 작품은 ‘꿈’에서와 같이 희거나 붉은 보름달이 무심하게 떠 있다.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여러 그림을 그렸음에도 루소는 정글을 가본 적도, 파리로 이주한 이래 단 한 번도 파리를 떠난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루소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1870년대 초부터 20년 넘게 파리의 세관 사무소에서 일한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루소는 파리 센강을 지나는 배의 통행료를 받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접하게 된다.
어느 날 프랑스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펠릭스 클레멍이 루소의 이웃으로 이사해 온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던 루소에게 클레멍은 미술에 관한 조언자를 자처했고, 그의 주선으로 루소는 파리 시내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며 실력을 키워 갔다. 주중에는 세관원으로, 주말에는 그림을 그린 루소는 ‘일요화가’라고 불렸다. 누군가는 그의 아마추어 시기 그림을 두고 정확하지 않은 인체 비례나 어색한 묘소를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숙련된 화가들이 그린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 신선하고 참신한 화풍으로 루소는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세관직에서 은퇴하고 50세쯤 됐을 때 루소는 본격적으로 작품에 매진하며 늦깎이 화가로 뒤늦게 예술의 꽃을 피웠다. 초록빛이 가득한 정글은 루소의 시그니처다. ‘꿈’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이자, 마지막으로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본 시인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찬사를 보냈다. “이 작품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린다. 올해는 누구도 앙리 루소를 비웃지 못할 것이다.”
정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화가가 이토록 생생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예술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루소에게 영감을 줬던 곳은 근대 도시 파리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던 식물원, 동물원 혹은 박람회장이었다. 제국 열강의 경쟁이 치열했던 19세기 말,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먼 나라의 풍습과 동식물을 전시하는 거대한 무대였다. 박람회장의 벽면은 열대 지역의 야생 식물, 박제된 동물이 가득했다. 화가가 된 이후 파리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루소에게 파리는 화가의 이국적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루소는 특히 동물원과 식물원이 결합한 형태인 자르뎅 데 플랑트를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동식물을 소재로 삼아 그의 상상으로 완성한 작품을 그렸다. 그의 작품을 연구했던 한 미술사학자가 식물학자에게 루소의 그림에 등장한 식물의 종을 밝혀 달라고 의뢰했다. 그 결과 어느 하나도 실제 식물의 종과 일치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고 관심을 가진 소재를 성실하게 묘사하기보다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던 상상의 세계를 구현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 작품은 완성된 직후 프랑스의 유명한 미술상에게 판매됐고, 여러 미술품 수집가를 거쳐 현재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돼 있다. 그림책에서 볼 법한 환상적인 세계,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순수함이 묻어 있는 루소의 ‘꿈’. “온실에 가면 열대 지방에서 온 진기한 식물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볼 때 나는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앙리 루소)
일상이 반복되는 도시 생활에서 야생의 자연은 그가 그리던 꿈의 장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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