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육군

[호국보훈의 달에 만난 사람들] 명예 걸고 명예 찾다

입력 2025. 06. 18   16:34
업데이트 2025. 06. 1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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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에 만난 사람들 
육군1군단 이해욱 상생협력실장

비정규군 2만 명 중 4000명 공적 인정
무명의 노병, 행적 증빙할 자료 없어
보상 신청조차 못하는 모습 안타까워
“당연한 권리 찾는 게 최소한 보답”

 

6·25전쟁 당시 비밀리에 조국을 위해 헌신한 영웅들이 있었다. 민간인 신분으로 미 극동군사령부 한국연락처(켈로부대),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8240부대) 등에서 첩보 수집, 유격 활동 등을 전개한 ‘비정규군 공로자’가 대표적이다. 전쟁 기간 비정규군으로 활동한 이는 국방부 추산 2만여 명이다. 이 중 공적을 인정받은 이들은 4000여 명뿐. 남은 이들 대부분은 당시 행적을 증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참전용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공식 군번도, 계급도 없는 상태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의 명예를 찾아드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육군1군단 이해욱(군무서기관) 상생협력실장을 만나봤다. 글=최한영/사진=조용학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파주시 법원읍의 권호성 옹 자택을 찾은 육군1군단 이해욱(왼쪽) 상생협력실장이 6·25전쟁 당시 백령도에서 비정규군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권옹의 증언을 청취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경기 파주시 법원읍의 권호성 옹 자택을 찾은 육군1군단 이해욱(왼쪽) 상생협력실장이 6·25전쟁 당시 백령도에서 비정규군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권옹의 증언을 청취하고 있다.



민원 예방 활동 중 권옹 사연 듣고 도움 

이해욱 실장이 요즘 가장 관심을 갖고 명예 선양에 힘을 쏟는 분은 미 해병대 특수부대 소속으로 백령도에서 비정규군 임무를 수행했다는 권호성(가명) 옹이다.

10여 년 전, 이 실장은 경기 파주시 무건리훈련장 일대에서 민원 예방 활동 중 권옹을 알게 됐다. 가족 없이 혼자 지내며 생활고를 겪고 있던 권옹을 돕기 위해 지역기관과 마을 부녀회에 사연을 알려 쌀·반찬을 지원받을 수 있게 했다. 매년 명절과 어버이날에는 선물도 전달하고 업무로 인근을 지날 때면 집을 찾아 생활을 살피고, 말동무를 해드렸다.

 

그러던 중 권옹이 미 해병대 특수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마침 국방부가 6·25전쟁 당시 적 지역에 침투해 첩보 수집이나 유격 활동을 했던 사람의 공로를 인정하기 위한 ‘6·25 비정규군 보상법’을 제정하고 보상 신청을 받고 있었다. 권옹은 당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나 사진, 보증인이 없어 신청조차 못하고 있었다. 권옹은 처음에는 ‘보상을 바라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것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수차례에 걸친 설득 끝에 2022년 권옹과 함께 경기북부보훈지청을 찾았다. 상담 결과 ‘특수요원으로 복무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자료 없이는 방법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병적기록도 살폈지만, 1954~1956년 군 복무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신청 기간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냥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권옹의 이야기가 무척 구체적이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 실장은 권옹의 증언이 직접 겪지 않았다면 말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아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증언 청취 중인 이해욱(왼쪽) 상생협력실장.
증언 청취 중인 이해욱(왼쪽) 상생협력실장.



“백령도에서 황해도 오가며 비밀임무 수행” 

1926년생, 올해 100세인 권옹은 70여 년 전 기억이 생생하다. 아래는 권옹의 증언 일부다.

황해도 장연군이 고향인 권옹은 광복 직후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권옹은 “광복 후 1주일간 집을 비운 머슴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나서 재산을 몰수하고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허름한 집에서 생활할 것을 종용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에 강제 징집됐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한 권옹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을 떠난 사이 부모님이 잔인하게 살해된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네 명의 동생과 삶을 영위하던 중, 1·4후퇴로 다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마을에서 반공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 문제가 됐다. 동생들이 ‘대(代)를 이어야 한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라’며 등을 떠미는 통에 홀로 피란길에 올랐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몇 발짝씩 옮기며 돌아봤던 동생들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생들이 혹시 살아있을 수 있기에, 그들의 안위를 걱정한 권옹은 가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백령도로 피란 온 권옹은 미 해병대 특수부대원을 비밀리에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했다. 전 재산은 물론 부모님 목숨까지 빼앗은 자들에게 대항하는 일이었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훈련을 마치고, 김필묵 대장을 포함해 7명의 전우와 임무를 수행했다. 권옹은 황해도 일대로 침투해 무기·식량창고를 확인하고 무전으로 위치를 보고했다. 그곳에서 미 공군 항공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사이, 막사에서 뛰쳐나오는 적을 사살하고 본대로 복귀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증명서 하나만 받고 임무에서 해제됐다. 전후 혼란한 상황에서 권옹의 복무 사실은 인정받지 못했다. 1954~1956년 두 번째 군 생활까지 마치고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는 사이 ‘미 해병대 특수요원’의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증명서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권리 찾지 못하는 참전용사들에 관심을” 

이런 권옹의 생생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증빙자료가 없는 탓에 낙담하던 중,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올해 초 국방부가 만료됐던 ‘6·25 비정규군 공로금 지급 신청’ 기간을 연장한 것이다. 올해 4월 1일부터 내년 3월 31일까지 추가 신청이 가능해졌다. 확인 결과 문서·사진·보증인이 없더라도 본인 진술을 토대로 전사(戰史)와 각종 사료를 비교·분석해 비정규군 인정을 받은 사례가 있었다. 이 실장은 권옹의 자필 편지, 본인 진술 영상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수집해 국방부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하고 있다. 권옹이 특수요원으로 활약한 내용과 경로를 정리하고, 참전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진술서도 심사위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작성하고 있다.

이 실장은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참전용사를 돕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이라며 “고령에, 사정이 여의찮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찾지 못하는 참전용사들이 없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옹도 이 실장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사함을 표시했다. 권옹은 “박사님(이 실장)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며 “결과에 상관없이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노병(老兵)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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