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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대 모두가 배우

입력 2025. 06. 17   15:48
업데이트 2025. 06. 1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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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연극 ‘유령’ 

무연고자 죽음으로 시작 과격할 정도로 파격 진행
극 안팎과 연기-현실 오가며 삶·죽음 경계 흩트려
연출자 없는 ‘인생 무대’…내 역할에 최선 다할 뿐

연극 ‘유령’의 한 장면. 사진=서울시극단
연극 ‘유령’의 한 장면. 사진=서울시극단



‘노래 빠진 뮤지컬’ 같은 연극이 넘쳐나는 시대. 오래간만에 지극히 ‘연극적인’ 연극 한 편을 보고 왔다. 달리 표현하자면 연극이 연극으로 말하는 연극이랄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막을 올린 서울시극단의 창작극 ‘유령’은 명장 고선웅이 극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삶과 죽음, 무대와 현실, 배우와 관객의 경계를 고집스럽게 흩트려 놓으면서 무연고자의 삶과 죽음을 출발점 삼아 인간 존재의 본질로 깊숙이 파고든다.

주인공 배명순은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뒤 ‘정순임’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떠돌며 살아간다.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뒤 원래의 배명순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무연고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시신 안치실로 옮겨진 그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떠도는 유령들을 만나게 된다.

줄거리만 보면 슬픈 사회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연극을 고작 한 칸 남짓 좁은 방 안에 가둬둘 수는 없다. 이 작품이 진짜 충격적인 이유는 배우들이 극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과격할 정도로 파격적인 진행 방식에 있다. 흔한 ‘극 중 극’의 틀을 훌쩍 넘어선다. 어느 순간 관객은 배우가 지금 극중 캐릭터인지, 배우 본인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혼란이 연출가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것임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지하는 배명순과 정순임을 오가다가 “무슨 연극이 이 꼴이냐”고 벌컥 화를 내며 무대를 나가버린다. 악역을 도맡은 강신구는 “왜 나한텐 이런 역할만 주냐”고 툴툴대며 두들겨 패기라도 할 듯 연출자를 찾는다. 그러나 신이 부재한 세계처럼 연출자는 끝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무대감독, 캐스팅되지 않은 배우, 분장사 등 연극 밖 인물들이 무대 안으로 들어오며 세계는 더욱 혼란스러운 공간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연극은 대단히 연극적이다. 고선웅은 특유의 연출기법을 십분 발휘해 무대조차 연기하게 만든다. 금속성 냉동고들이 줄지어 있는 시체 안치실, 정방형 큐브로 가득한 바닥은 공간을 죽음으로 상징화한다. 귀신으로 분한 배우들이 바퀴 달린 신발을 신고 위태롭게 무대 위를 움직이도록 만든 아이디어도 좋다.

 

 

연극 ‘유령’의 한 장면. 사진=서울시극단
연극 ‘유령’의 한 장면. 사진=서울시극단



분장실은 또 하나의 상징이다. 가면을 쓰고, 다시 벗는 장소다. 관객은 이곳에서 자신이 아닌 인물로 살아갈 준비를 하는 배우이자 인간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극이 진행되면 이 장소는 분장실이자 시체 안치실이자 삶의 막간처럼 느껴진다.

‘유령’이 던지는 질문은 한 손으로 쥐기에 꽤 묵직하다. “세상은 무대, 사람은 배우.”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정해진 배역을 살아간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그저 배역에 충실할 뿐이다. 배우는 연출자에게 불평을 쏟아내지만 인생의 배우는 누구를 향해 책임을 묻고 욕을 할 수 있을까. 이 연극은 이런 질문을 곳곳에 뿌려두고는 연출자의 부재라는 구조를 통해 회피가 아닌 성찰을 요구한다. ‘인생의 연출자’는 무대에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배역을 맡아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메시지를 객석으로 나르는 방식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터무니없이 웃기다가도 당황할 정도로 진지해진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 뮤지컬 캣츠의 ‘메모리’,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 같은 예상치 못한 음악들이 튀어나오며 웃음과 눈물, 긴장을 밀고 당긴다. 무거운 메시지를 강속구가 아닌, 너클볼처럼 너풀너풀 던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묵직한 너클볼’이란 걸 창안해 낸 고선웅의 천재성에 놀랄 뿐이다.

묵은지로 끓인 찌개 같은 중견 배우들의 연기는 이 연극의 큰 재미이자 감동이다. 6년 만에 무대로 복귀한 이지하의 존재감이 가볍지 않다. 분장실 거울 앞에서 ‘배명순’과 ‘이지하’를 오가고, 극 중에선 현실과 회고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그의 연기는 연극적 허구와 인간적 진실을 동시에 증명하고 있다. 유령이 돼 자신의 시신과 작별하는 순간의 연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극과 극의 감정을 마디마디 쪼개는 신현종, 거친 유머 속에 서늘한 리얼리티를 품은 강신구. 배우들 모두가 자기만의 무게로 무대를 완성한다. 이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이 연극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괴작이 돼버렸을지 모른다.

극이 정점에 이르면 유령들과 시신의 작별 장면이 펼쳐진다. 유령들이 시신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무대감독은 시신에 불을 붙인다. 흰옷으로 표현된 유령들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동안 조명은 붉게 타오른다. 모든 죽음을 시각적으로 화형화함으로써 종잡을 수 없던 이야기 조각들은 순식간에 한 점을 향해 모여들어 마무리된다. 마치 고전 교향곡 4악장의 결말처럼 장엄하기 그지없다.

이 연극의 끝은 ‘배우 이지하’의 독백이다.

“배명순, 정순임, 다시 배명순, 다시 이지하. 안녕.” 이윽고 배우, 캐릭터, 무대의 존재들은 퇴장한다.

이 연극의 유령들은 살아 있는 동안 지워졌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름 없이 죽었고, 존재 없이 살았다. 그들은 배우들의 몸을 빌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연극 ‘유령’은 부재를 말하면서도, 그 어떤 연극보다 강한 존재감으로 관객을 붙든 작품이었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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