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역사 - 남성엔 권력 여성엔 매력 …
고대 이집트 귀족계급 전유물로 탄생…11세기엔 교황도 착용
중세 유럽 오물 피하기 위해 나무굽으로 만든 게 조형적 시초
루이 14세 ‘단신 콤플렉스’ 필수템으로 패션화돼 쓰이기 시작
20세기 들어 마릴린 먼로 ‘여성성’ 어필…섹시한 여성 상징으로
하이힐(high heels). 신고 있으면 몸이 앞으로 쏠려 불편하지만 다리맵시를 돋보이게 해 매혹적이다. 현대 여성은 하이힐을 신음으로써 자신의 매력을 한층 더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하이힐을 가장 오랜 기간 열정적으로 신었던 이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7세기 프랑스를 들 수 있다.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왕과 귀족이 키를 커 보이게 하고, 자신의 시각적 우월성을 곧 권위로 바꿔 과시하고자 하이힐을 신었다.
하이힐의 가장 먼 기원은 고대 이집트다. 당시 귀족은 고위층일수록 자신을 돋보이게 꾸미고자 했고, 하이힐은 바로 이러한 고위층의 욕망이 만들어낸 사치품의 일종이었다. 하이힐은 이후 그리스와 로마, 페르시아 등 유라시아 전체에 전파됐다.
이 높은 구두가 처음 실용적으로 빛을 발한 장소는 뜻밖에도 전쟁터였다. 10세기 페르시아 기병들은 말 위에서 활을 쏠 때 발이 등자(?子: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만든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에서 빠지지 않도록 고정하기 위해 굽 높은 부츠, ‘칼라시(kalash)’를 신었다. 말이 빠르게 질주할 때 몸이 흔들려 중심을 잃는 건 목숨이 달린 중요한 문제였다. 칼라시는 매우 훌륭하게 기병이 안정되게 서서 화살을 쏘도록 지탱했다. 이후 승마는 비싼 장비와 오랜 훈련이 필요해 귀족과 부유층이 즐기는 취미였기 때문에 일상에서 칼라시처럼 굽 높은 신발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게 됐다.
11세기 동서교회가 갈라선 뒤 로마 교황은 붉은색 굽 있는 구두를 신기 시작했다. 이는 종교 권위와 구별된 신성성을 신발로 표현한 상징이었다. 12세기 인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있었다. 텔랑가나주 라마파사원에는 ‘파두카(paduka)’라는 굽 높은 신을 신은 여신 조각상이 남아 있다. 이제 신발은 단순한 보호구를 넘어 지위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다.
중세 유럽에서는 실용과 허영이 맞물렸다. 배설물과 오물로 가득한 길거리에서 신발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패튼(patten)’을 신었다. 이는 신발 밑에 덧대는 나무 받침으로, 오늘날 하이힐의 조형적 시초 중 하나다. 15세기 베네치아에서는 ‘초핀(chopine)’이라 불리는 신발이 유행했다. 어떤 초핀은 굽이 30㎝가 넘을 정도로 높았고, 걸음을 보조하는 하인이 따라붙기도 했다. 베네치아 당국은 높이를 7.5㎝로 제한했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말엽, 귀족 사이에서는 승마용 부츠가 유행했다. ‘카발리에 부츠(cavalier boots)’라 불린 이 부츠는 처음엔 낮은 굽이었지만 영국 내전 무렵엔 5㎝가 넘는 높은 굽이 됐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나타났다. 만청(滿淸) 지배 아래 여성들은 전족으로 잘 알려진 ‘연화화(蓮花鞋)’를 신었지만, 일부 상류층 여성은 굽이 아닌 바닥 한가운데가 솟은 특이한 형태의 높은 굽의 신발을 신었다. 이는 초핀과 마찬가지로 실용과 권위, 미의식을 뒤섞은 상징이었다.
하이힐이 진정한 ‘패션’으로 자리 잡은 건 17세기 프랑스 궁정에서였다. 절대왕정의 정점에 섰던 루이 14세는 키가 작다는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굽이 높은 구두를 즐겨 신었다. 루이 14세는 붉은색 가죽 굽을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고, 오직 왕이 특별히 허락한 귀족만이 붉은 굽을 신을 수 있었다. 왕이 걷는 길에는 늘 굽 소리가 또각또각, 또렷이 울려 퍼졌다. 힐의 높이가 곧 왕의 권위였고, 붉은 굽은 복종과 충성을 표시하는 훈장이었다.
왕이 힐을 신자 귀족들도 따라 신었다. 누구보다 높고 화려한 굽을 신기 위한 경쟁은 점점 과열됐다. 실내 궁정화(宮庭靴)에도, 외출용 장화에도 굽이 달렸다. 왕 앞에서 굽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특권이었고, 궁정에선 굽을 높이는 일이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이 시기의 하이힐은 남성 패션의 꽃으로서 절정을 구가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 힐은 남성다움, 권위, 계급을 상징했다. 실용성은 사라졌고, 궁정 예법과 패션이 하이힐을 유지하게 했다. 하이힐은 말 위가 아니라 궁정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도구가 됐다. 이렇게 화려한 권위의 낭비가 절정에 다다르자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하이힐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피를 흘리며 무너진 건 왕과 귀족만이 아니었다. ‘구태’ 권위의 상징이었던 붉은 굽, 장식적인 힐도 함께 역사의 처형대에 올라갔다. 실용과 평등을 내건 시민 사회는 과시적 패션을 혐오했고, 굽 있는 신발은 구체제의 잔재로 밀려났다.
이후 19세기 중반 하이힐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제 무대는 더 이상 궁정이 아니라 거리였고, 주인공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 힐은 더 이상 권력을 상징하지 않았다. 대신 여성다움, 섹슈얼리티, 유혹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하이힐은 그렇게 성별과 역할을 바꾸며 또 다른 신화를 써 내려갔다.
20세기에 들어서며 하이힐은 대중문화의 주인공이 된다. 특히 1950년대, 마릴린 먼로는 하이힐을 신고 스크린 위를 유영하며 ‘여성성’의 전형을 새로 썼다. 그녀의 걸음걸이, 자세, 몸짓은 힐 없이는 완성되지 않았다. 얇고 뾰족한 ‘스틸레토 힐’은 빠르게 유행했고, 수많은 여성이 먼로처럼 보이길 원했다. 하이힐은 이제 패션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힐은 ‘여성의 사회성’의 상징이 됐다. 사무실 책상 아래, 회의실 바닥, 연단 위에서 또각또각 울리는 힐 소리는 이제 개인의 선택이자 경쟁의 무기였다. 하이힐은 더는 궁정의 특권도, 오락의 소품도 아니었다. 산업사회와 소비문화 속에서 여성의 신체와 욕망, 노동과 규율을 함께 껴안은 복잡한 기호가 됐다.
21세기 들어 하이힐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보기엔 날렵하고 단정하지만 신는 이는 불편하고 피로하다. 장시간 착용은 발가락 변형, 무릎 통증, 허리 이상까지 부른다. 일터에서 힐을 신어야 한다는 암묵적 규범은 일부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격식을 갖춘 자리일수록 힐을 선택하지 않으면 ‘무례’하다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사회적으로 미적 기준이 실용성을 앞설 때 하이힐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최근엔 달라졌다. ‘플랫슈즈(flat shoes)’, 굽 낮은 로퍼 등이 등장했다. 공항이나 지하철, 회의실에서도 운동화와 힐이 섞여 보인다. 과거 같으면 ‘격’이 안 맞는다던 자리에 지금은 스니커즈가 들어섰다. 외모보다 이동과 피로, 하루 일정을 먼저 고려하는 사람이 늘었다.
하이힐은 여전히 우리 삶 속에 남아 있고, 여전히 쓰인다. 다만 이제는 신발장에서 필요할 때만 꺼내 신는, 철저하게 목적에 따라 선택되는 ‘도구’ 중 하나로 물러났다.
하이힐은 늘 변신해 왔다. 전쟁터에서 시작해 궁전과 무도회를 거쳐 사무실과 거리까지,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걷고 또 걸었다. 권력이든 욕망이든 실용이든, 하이힐은 늘 누군가의 필요에 맞춰 모습을 바꿨다.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하이힐은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더는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꺼내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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