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고종과 명성황후가 수호신으로 모시던 관우 사당

입력 2025. 06. 12   15:54
업데이트 2025. 06. 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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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서울 종로 ‘북묘(北廟)’ 

1883년 송시열이 살았던 집터에 지어
고종 내외 총애 받던 무당 진령군 거주
궁 드나들며 막강한 영향력 국정 농단 
명성황후 시해당한 후 역사서 사라져
1913년 동묘와 합사된 후 폐사돼

 

북묘 바로 위 한양도성.
북묘 바로 위 한양도성.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북묘(北廟)’라는 사당이 있었다. 고종 내외의 절대적 신뢰를 얻던 무당 진령군(眞靈君)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1883년 10월 21일, 창덕궁 가까운 곳 송시열이 살던 집터에 북묘를 지어 준공하던 날, 왕과 왕비는 왕세자와 함께 가서 제사를 올렸다. 기거하던 창덕궁에서 산 너머 북묘까지 왕이 다니기 편하도록 길도 텄다.”(『승정원일기』)라는 기록에 근거해 그 장소를 찾아 나섰다.

지금은 없어진 곳이라 북묘 터를 찾기 위해서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집을 먼저 찾아야 했다. 구보는 헤매고 다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모두 말에서 내려라)’라고 쓴 하마비와 그 안쪽 골목 바위벽에 새겨 놓은 우암의 친필 덕분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성균관로17길 37이었다. 연립주택 앞 바위벽에 선명하게 새겨진 ‘증주벽립(曾朱璧立)’ 네 글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교의 성현인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받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글자 너머로 모화(慕華)사상이 깊었던 우암이 드러난다.

북묘 옛터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성균관과는 10분, 창덕궁과는 30분 거리였다. 1401년 태조 이성계가 흥덕사를 창건했던 연유로 ‘흥덕골’이라 부른 이 일대는 송시열이 살았다 해서 ‘송동(宋洞)’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빼곡하게 주택이 들어차 있지만,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들이 많아 시인 묵객들을 불렀다.

다산 정약용도 성균관서 유학하던 1784년 봄, 이곳을 찾아 ‘살구꽃이 활짝 피고 버들 빛이 짙푸른 풍경 속에서 소나무 그늘에 앉아’ 동학들과 시를 지으며 놀았다(『다산시문집』). 연암 박지원도 이곳에서 진달래 화전(花煎)을 부쳐 먹으며 봄날을 즐겼다(『연암집』).

구보는 다산과 연암의 풍류를 상상하며 골목 끝 좁은 통로를 따라 산길을 올라가다 멈춰 서서 송동을 내려다본다. 혜화문에서 능선을 따라 뻗어온 한양도성이 감싸고 있는 풍경에서 예전에는 깊은 골짜기였음을 능히 짐작한다. 지금은 골짜기도, 앵두도, 송시열의 고거도, 북묘의 옛터도, 모두 다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 우암의 바위 글씨만이 그곳을 스쳐 지나간 시간을 품고 있을 뿐이다. 북묘는 조선총독부 지시로 철거됐다. 그곳에 있던 북묘비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무녀 진령군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반란군의 습격을 피해 장호원으로 피신했던 명성황후가 그곳에서 만난 신기(神氣)가 있던 촌부였다. 이 여성은 “명성황후가 곧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불안에 떨던 명성황후의 심사를 달래줬고, 일자를 정확하게 맞히면서 명성황후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북묘는 관제묘(關帝廟)의 하나로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關羽, 160~219)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었다.


북묘 터이자 우암 송시열 옛집.
북묘 터이자 우암 송시열 옛집.

 

북묘 터. 사진=서울6백년
북묘 터. 사진=서울6백년

 

북묘 입구 흥덕사 터 표지석.
북묘 입구 흥덕사 터 표지석.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은 이 장호원 출신 무녀로 하여금 묘당을 지키며 관우를 모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무녀가 명성황후를 처음 만나던 날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말했던 연고였다. 고종은 임오년 봄 관우가 현몽해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주는 꿈을 꾼 후 관우를 수호신으로 여겼다. 명성황후도 며칠 후 똑같은 꿈을 꾸면서 부부가 함께 관왕을 숭신했다(『별건곤』 23호, 1929). 그러던 차에 ‘관우의 딸’을 만난 터여서 애정이 컸다. 

북묘는 고종 내외와 한 번 더 인연을 맺게 된다. 건립 이듬해인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 와중이다. 무력 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에게 잡혀 있던 고종은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치면서 홍영식을 따라 북묘로 피신했는데, 홍영식이 정변 주모자임이 발각돼 청군에게 칼을 맞아 죽고 고종은 무사히 풀려나온 것이었다. 진령군이 북묘를 짓자며 “묘당을 세우면 앞으로 큰 덕을 입을 것”이라고 했던 예언이 또 적중한 셈이 된 것이다.

고종은 감동해 1887년 손수 비문을 짓고 민영환에게 글씨를 쓰게 해서 ‘북묘비’를 세웠다. 고종은 비문에서 “왕과 왕비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났다. 임오년 변란 때도 갑신년 변란 때도 관운장이 우리를 살렸다”고 썼다. 구보는 관왕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던 고종의 심사가 북묘비에 담겼다고 여긴다. 미신은 이성이나 지력으로 사리를 판단할 능력이 결여됐던 고종 내외의 도피처였던 셈이다.

고종이 명성황후의 청을 받아들여 7종 천민으로 취급받던 무당에게 군호(君號)를 내린 것은 유사 이래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진령군은 수시로 궁을 출입하며 왕과 왕비를 만났다. 남장하고 나타나면 왕과 왕비는 “군(君)이 되니 더욱 믿음직하도다”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왕후가 그녀가 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내외 관직의 제수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진령군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수령과 방백들의 직이 떨어지기도 했다. 삿된 자들이 북묘를 들락거렸다.

“대신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앞다투어 그녀에게 아부했다. 자매라 부르기도 하고 수양아들이 되길 원하기도 했다(『소호당문집』).” “윤영신, 조병식, 정태호, 이용직이 특히 심했다. 이들은 무당의 도움으로 출세했다(『매천야록』).” 매천 황현이 언급한 인사들은 모두 관찰사와 예조판서 등의 중책을 얻었다. 탐학하고 수뢰와 축재를 일삼아 유배형을 받았던 탐관오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진령군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아부하며 벼슬을 확보했다(『고종실록』, 1894.12.27.).

많은 대신이 진령군을 탄핵했으나 고종과 명성황후는 오히려 탄핵에 나선 대신들을 책할 정도로 진령군을 믿고 의지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미신에 집착했다. 도가 지나칠 정도여서 많은 이가 우려했다. 눈 밝은 몇몇 지식인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개탄했다. 형조참의로 있던 지석영이 올린 상소가 대표적이다.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를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리는 요사스러운 자를 아끼고 비호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고종실록』 31년 7월 5일).”

사헌부 지평 안효제는 맨 먼저 1000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진령군의 비위를 고했으나 고종 내외의 분노를 부르면서 도리어 유배형을 받았다. 마침내 군국기무처에서도 진령군에 대한 처벌 의안을 올렸다. 고종은 마지못해 “공론이 그러하니 응당 처분을 내리겠다”고 비답하였으나 진령군은 이미 충주로 도망친 후였다(『매천야록』, 황현).

1895년 을미년 명성황후가 일인들에게 시해당하면서 그동안 갑오개혁과 청일전쟁 발발 등으로 신뢰를 잃어 쫓겨나 있던 진령군도 왕비를 따라 숨을 거뒀다. 일세를 풍미한 ‘코미디’가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나라는 이미 기강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북묘는 1913년 창신동 동묘와 합사된 후 폐사됐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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