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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같은 사랑인가 외면받을 일탈인가

입력 2025. 06. 10   16:41
업데이트 2025. 06. 1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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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연극 ‘마가렛 화인’

내조 육아가 전부이던 전업주부
자신이 지워진 삶 속에서
불같이 시작된 화려한 일탈
혹자는 불륜이라 단죄하지만
마음 깊은 곳 잔잔한 떨림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워

 

연극 ‘마가렛 화인’ 한 장면. 사진=예술나루
연극 ‘마가렛 화인’ 한 장면. 사진=예술나루



대한민국 교육의 메카 서울 대치동. 그 욕망이 뒤엉킨 공간에서 사람들은 삶의 가치를 저마다 정의한다. 그 속에 묶여 내조와 육아만을 위해 사는 전업주부인 40대 여성 ‘화인’은 젊은 날의 꿈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 아니 기억할 수 없는 여인이다.

어느 날 학부모 모임에서 사랑에 관한 질문을 하는 귀남과 화려한 일탈을 하게 되는 화인. 평생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화인은 생애 처음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운명적 사랑, 정혁과 만나게 되는데….

얼마 전 봤던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화가를 꿈꿨지만, 전쟁 통에 미군과 결혼 후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의 시골 마을 아이오와에서 살아가는 프란체스카. 그는 사진 촬영차 마을을 찾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프리랜서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를 만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에 빠진다. 일부에서 ‘불륜의 미화’라는 볼멘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 두 중년의 운명적 연애는 전 세계 사랑꾼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연극 ‘마가렛 화인’의 주인공 화인은 프란체스카와 겹쳐 보이는 부분이 많다. 시인이 되길 꿈꿨고 등단까지 했지만, 부모의 뜻에 따라 변호사 남편과 결혼해 갖은 무시와 모욕을 감내하며 ‘대치동 맘’으로 살아가는 중년 여성이다. 오랜 시간 남편의 내조와 자녀 교육에 인생을 쏟아 왔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지워진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의 같은 반 학부모 귀남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들어간 호스트바에서 대학 시절 자신을 짝사랑하던 후배 정혁을 만나며 그의 일상은 조용히,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린다.

태어나 단 한 번,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화인. 그는 처음으로 ‘나’를 되찾고, 묻어 둔 감정을 꺼내 직면한다. 그의 사랑을 불륜이라는 무딘 칼로 무 자르듯 단죄해 버릴 수 있을까.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끈적거리는 모호함을 떨쳐 내지 못한 채 화인을 바라볼 뿐이다. 결국 누군가는 외면할 것이고, 누군가는 응원할 것이다.

 

 

연극 ‘마가렛 화인’ 한 장면. 사진=예술나루
연극 ‘마가렛 화인’ 한 장면. 사진=예술나루

 

연극 ‘마가렛 화인’ 한 장면. 사진=예술나루
연극 ‘마가렛 화인’ 한 장면. 사진=예술나루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마가렛’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 순수한 사랑, 운명, 희망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이 단어들은 화인의 감정에 깊이 뿌리내린다. 

화인을 연기한 배우 김혜주(경기대 연기학과 교수)는 복잡하고 섬세한 캐릭터의 감정선을 외과 수술하듯 정밀하게 꿰어 나간다. ‘킬링 마티니’ ‘하와이 상’ ‘봄의 아일랜드’ ‘숲’ ‘생의 문턱’ ‘농촌 청년’ 등 다수의 무대 경험에서 얻었을 게 틀림없는 ‘절제된 감정이 더 울림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의 눈과 입의 근육, 척추의 움직임, 손가락 끝까지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소극장 공연치고는 꽤 많은 배우가 등장하는데, 김혜주는 하얀 꽃잎들로 둘러싸인 마가렛의 노란 심처럼 빛난다.

귀남 역의 류시현 연기도 마음에 남았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익숙한 그의 얼굴을 무대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갑지만, 또렷한 딕션과 리듬감이 살아 있는 연기가 더 반갑다. 귀남은 화인을 문제의 호스트바로 이끄는 인물이자 화인의 남편 양수와 함께 이 작품의 빌런이다. 류시현의 귀남이 생기를 얻으면서 화인은 더 활짝 피어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한 배우를 향한 헌정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작품 전반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삶의 무게와 회한이 조용히 스며 있다. 관객들은 지나치게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감정의 덤벨을 쥐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아는 맛이 무서운 맛’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뒤끝이 삽상하지는 않지만, 감당하기 불편할 만큼 답답하거나 무겁지도 않다. 무엇보다 김혜주, 류시현, 김필(화인의 남편 역)과 같은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고마워지는 작품이다.

제작은 순수 창작, 명쾌한 텍스트 분석, 유쾌한 무대 언어, 생생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관객에게 행복을 전달하는 일을 모토로 삼고 있는 극단 유쾌한씨어터가 맡았다.


‘마가렛 화인’은 거대한 담론을 다루는 연극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한 번쯤 마주칠 수 있는, 우리 삶을 흔들고 변화하게 하는 사랑과 존재에 관한 ‘작은 담론’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연출을 맡은 김정선 작가는 “사랑이란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 사랑을 꿈꾸는 이, 이 순간 사랑하고 있는 이, 혹은 사랑의 배신에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해 잔잔한 생채기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황연희(대진대 연기예술학과 교수) 예술감독은 “타인에 의해 정형화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삶을 느껴 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고 했다.

이 작품은 돌멩이가 돼 날아와 우리의 마음 한복판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사실은 생채기 위에 연고를 발라 주는 연극일지 모른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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