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 미주 동포 순방과 새로운 구상
공산당원 모함 투서에 미국 비자 거절
우여곡절 끝 입국 후에도 이민국 감시
미 동서부 넘나들며 동포들 격려·강연
서재필 만나 새 독립운동 방략 논의도
일생의 꿈 ‘모범촌’ 건설 꾸준히 추진
장소 물색·토지 매입…해외 답사까지
다시 미국으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도산은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고 협조를 얻기 위해 미주에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1922년 11월 도산은 서재필에게 비자 발급 교섭을 부탁했다. 서재필은 미국 상원의원 스펜서를 통해 국무부에 비자 발급 주선을 요청했다.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도산은 1923년 8월부터 이탁(李鐸)과 함께 모범촌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산 일대를 둘러보고,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박일경(朴一敬)과 함께 만리장성 부근 산해관·금주(錦洲)·호로도(葫蘆島) 등지를 답사했다. 이어 서·북간도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고, 독립군 대표들을 만났다. 1924년 2월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난징으로 옮기고, 광둥 지역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했다.
도산이 기다리던 미국 비자 발급이 거절됐다. 그 이유가 “안창호는 공산당원”이라는 ‘한국인 인도자’의 투서 때문이라는 사실을 2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그래서 도산은 ‘安彰昊(안창호)’라는 이름의 중국 여권으로 8개월 체류 비자를 받아 1924년 11월 22일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12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도산은 400여 명의 교민이 모인 한인단체연합회가 주최하는 환영회에 참석했다. 3일간 동포 사회를 둘러본 도산은 12월 10일 하와이를 떠나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튿날 오후 8시 한인 감리교회에서 주최한 환영회에서 도산은 ‘따스한 공기’라는 주제로 ‘사랑’과 ‘정의돈수’에 관해 연설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도산은 1924년 12월 21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 6년 만에 가족과 상봉했다.
마중 나온 부인 이혜련은 그동안 부쩍 자란 장남 필립을 도산이 알아보지 못할까 봐 마음졸였다는 이야기가 ‘신한민보’(1924.12.18.)에 전해진다. 이때 잉태한 막내아들 필영은 평생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는 도산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도산은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새로운 도전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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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지역 동포 순방
도산은 한 달 남짓 가족과 함께 보낸 후 1925년 2월 초부터 캘리포니아 스톡턴과 새크라멘토를 시작으로 동포들을 방문하는 여정에 올랐다. 2월 중순부터 다뉴바-리들리-벤다-콜린가의 동포들을 방문하고, 4월 10일부터 6월 중순까지 미국 동부지역을 순방했다. 덴버-시카고-필라델피아-뉴욕-워싱턴-보스턴-뉴헤이븐-폴리버-사우스벤드-디트로이트-캔자스 등지의 동포들을 격려하고 강연했다. 특히 흥사단 동지들과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했다.
도산이 미국 내에서 여행하는 동안에도 이민국은 계속 추적하며 감시하고 조사했다.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기 전날인 12월 15일 또다시 두 사람의 중국인 이름으로 도산을 ‘볼셰비키’라고 모함하는 투서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민국은 6개월이 지나서야 조사를 종료하고 6개월의 비자 연장을 허가했다. 그 후 여러 정황과 증거를 종합해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졌으나 동포 사회 통합을 중요시하는 도산은 겉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동포 사회의 불신과 분열에 마음이 아팠다.
5월 22일에는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방문해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했다. 6월 23일에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서재필의 환영회를 개최했다. 6월 말부터 7월까지 장리욱(張利郁)과 함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를 찾아 모르몬교의 자치공동체를 관찰하고, 모범촌 건설을 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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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촌 건설 운동
도산은 국내외 동포들의 삶의 터전이며,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모범촌 혹은 이상촌 건설 계획을 꾸준히 추진했다. 독립운동은 결코 단시일에 끝나지 않을 장기적인 운동이며, 언제·어디서든 동포들의 삶은 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은 군사나 외교처럼 특정 부문의 노력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종합적인 사업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단계적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 6대 사업’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도산이 구상한 ‘모범촌’은 이상적 지역공동체, 해외 동포들의 항구적 생활근거지, 독립운동을 위한 실력 양성기지 등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공동체적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이상적 교육공동체기도 하다. 실제로 20대에 리버사이드에 설립한 ‘파차파 캠프’와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흥사단은 도산이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힘이 됐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 세력이 됐다.
도산이 생각한 모범촌의 구조와 기능은 첫째, 마을행정을 위해 마을회관을 짓고, 그 안에 사무실과 상임 직원을 둬 대외 행정 및 지방행정을 담당한다. 둘째, 체육관·운동장·도서실·오락실·담화실 등을 설치해 주민들의 보건 후생과 친교를 돕는다. 셋째, 금융기관과 협동조합을 설치해 생산·판매·소비 생활을 지원, 주민의 경제생활을 근대화한다. 넷째, 일반교육을 위한 학교와 직업학교를 설립해 직업학교에서는 농업·임업·잠업·원예·목축·공업·건축·토목·식료품 가공·철공·요업 등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의 직업 교육을 실시한다(류태영, 『도산 안창호의 이상촌 운동과 새국민 운동』).
이런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도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소를 물색하고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그가 후보지로 선정해 추진한 곳은 황해도 봉산군 일대, 북만주 지린성 밀산현, 양쯔강 연안의 진강과 만주의 경박호 연안, 캘리포니아의 북미실업주식회사, 평양 근교 대보산 송태산장, 평남 강선역 부근의 달마산 기슭 등이다. 그뿐만 아니라 필리핀, 보르네오, 내몽골까지 관심을 가지고 답사했다(『흥사단100년사』). 이처럼 모범촌 운동은 정치적 상황과 자금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도산의 머릿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은 꿈이었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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