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머릿속 가르침, 가슴에 이르렀는지 물었을까…

입력 2025. 05. 29   16:48
업데이트 2025. 05. 2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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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성균관, 엘리트 양성소 

성리학 교육기관이자 유교 성소
세자도 책봉식 마치자마자 입학
200명 유생 공부만 전념토록 해 
‘식당’도 이들이 식사하던 곳서 유래
정치 비판 서슴지 않은 엘리트 집단 
인조반정 후 통문 돌려 처형되기도

 

성균관 별당 비천당 마당에서 열린 문묘제례악 공연. 사진=필자 제공
성균관 별당 비천당 마당에서 열린 문묘제례악 공연. 사진=필자 제공



세종 3년인 1421년 세종의 원자 이향(문종, 1414~1452)이 세자 책봉식을 한 뒤 바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유복을 입고 대성전에 들어가 문선왕(공자)과 안자·자사·증자·맹자 등 다섯 분의 배향위에 제사를 지내고 술잔을 올렸다(『세종실록』 3년 12월 25일). 앞서 예조는 세자가 누구에게까지 술을 올릴 것인지를 놓고 전례를 들추며 토론을 벌였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은 성리학 교육기관이자 유교 성소였다. 공간은 묘우(廟宇)와 학사(學舍) 두 구역으로 나눴다. 강학당인 명륜관 뜰에는 두 그루의 노거수 은행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은행들은 이곳을 거친 조선의 영재들을 두루 지켜보았을 터이다. 조광조, 이황, 이이, 정약용, 김정희, 신채호 등이다.

그 앞에 공자 위패를 모신 문묘(文廟)의 정전인 대성전이 있다. 태조 7년인 1398년에 지었다가 화재와 왜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기도 했다. 선조 때인 1601년 중건해 오늘에 이른다. 정위(正位)의 문선왕(공자)을 위시해 안자·자사·증자·맹자 등 5성(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송조육현(宋朝六賢), 그리고 설총·안향 등 우리 유학자 18위를 합쳐 39위가 봉안돼 있다. 현판은 석봉 한호(1543~1605)가 썼다. 이곳에서 음력 2월과 8월에 석전제를 지낸다(『태학지』). 석전은 중국이 문화대혁명 때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 없애버리면서 성균관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조선은 성균관 외에 전국 234개 향교에도 대성전을 두었다. 

 

성균관은 고려 충렬왕 24년인 1298년 개경에 설립된 최고 교육기관 국자감이 효시다. 성균관과 국자감으로 이름이 되풀이되다가 1362년 성균관으로 고정됐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개경과 한양의 성균관은 배치가 흡사하나 대성전 위치가 명륜당의 앞과 뒤인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추강집』). 이곳 터는 태조가 잡았다. “산이 감싸안고 두 줄기 시내가 빙 돌아 흘러 자연히 반벽(泮璧)의 형상을 이루는 신령한 땅”이었다(『월사집』). ‘성균(成均)’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매사를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고르게 조정한다’는 의미다.

 

 

성균관 명륜당. 사진=필자 제공
성균관 명륜당. 사진=필자 제공



성균관은 충효를 중시하는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보급함으로써 조선왕조 체제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왕은 석전 후 제목을 내려 비천당(丕闡堂) 뜰에서 과거를 실시한 뒤 옆 사단(射壇)에서 활을 쏘는 대사례(大射禮)를 가지곤 했다(『중종실록』 29년, 『영조실록』 19년·40년 등). 활쏘기(射)는 심신 단련의 과정으로 예(禮), 악(樂)과 함께 육예(六藝)에 포함됐다.

성균관은 200명의 유생을 두었는데,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들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에겐 과거 시험인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율곡 이이는 입학한 해에 장원급제하는 기록을 세웠다.

조선의 성균관은 정부와 일심동체의 성격이었다. “태조가 계룡산으로 행차했다가 숭인문(남대문)에 들어서자 성균관의 학관이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도열해 가요를 불렀다”(『태조실록』 2년 2월 27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태조 때 정도전과 권근을 필두로 정부에서 일하던 관리들도 성균관으로 전근돼 유생을 가르치다 다시 관직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잦았다. 일종의 관·학 협동이었던 셈이다.

조선 조정은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를 두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00일이 넘는 자 가운데서 50명을 뽑았다. 생원과 진사를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하려는 권유책이었다. 국왕이 친히 강의하고 시험도 치렀다(『정조실록』 19년 8월 2일). 왕이 유생들을 격려하며 술잔치도 벌였다. “취해서도 언행을 삼가라”는 주문을 담았다(『정조실록』 16년 3월 2일).

엘리트 집단답게 정치 현실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때 북인 정인홍이 남인들인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라며 권당(동맹휴학)으로 맞섰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허균의 옥사 결정에 부정적이거나 인목대비를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통문을 돌린 유생들이 처형되기도 했다(『인조실록』 1년 3월 17일).


명륜당 은행나무. 사진=필자 제공
명륜당 은행나무. 사진=필자 제공



성균관은 재정 지원기구인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기숙하는 유생들의 식량을 챙겼다. 미두를 저장해 매일 200명분의 식량을 공급했다(『견한잡록』, 심수경). 지방 특산물과 생선도 배정됐던 모양이다. “해마다 배당되던 소어(밴댕이)가 궁궐 진상을 핑계로 공급되지 않자 성균관이 유생의 지공(음식 장만)에 애로를 겪고 있다”는 상소 기록도 있다(『인조실록』 3년 6월 14일). 성균관 유생들은 수장인 대사성과 함께 ‘식당(食堂)’에서 식사를 했다. 지금은 일반명사지만 원래는 성균관의 고유한 공간 이름이었다.

‘식당’에 관한 첫 기록은 예조판서 황희가 성균관 수리 필요성을 꺼내며 식당 신축도 함께 건의하는 대목에 등장한다(『태종실록』 12년 5월 11일). 이 ‘식당’ 출입 횟수를 과거시험의 응시 자격으로 삼았다. 유생은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식당’에서 식사해야 출석부인 도기(到記)에 원점(圓點·둥근 점)을 받았다. 관시(館試)에는 300점을 채워야 응시할 수 있었다(『춘추도기』).

성균관을 둘러싸고 반달 형태로 시내가 흘러 반수(泮水)라 이름 짓고 학교는 ‘반궁’이라 칭했다. ‘반촌’으로 부르던 부근 마을에는 성균관을 관리하고 유생을 지원하는 인력이 모여 살았다(『추강집』).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유생에게는 밭과 노비도 제공됐다. 부족한 것 없는 공부 환경이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는 『반중잡영』에서 “반수 너머로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밤낮으로 아름답게 들린다”고 읊었다(『무명자집』). 유흥가와 상점, 푸줏간 등도 있었다. 앞날이 보장된 최고 인재들의 특별 공간이어서 관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성균관은 중등 교육기관인 사부학당과 지방의 향교를 관할하며 인의예지신 등 ‘오상(五常)’을 교육했다. ‘인(仁)’의 글자 모양에서 보듯 유교가 ‘사람 간 관계 설정’을 중시했지만 조선 사회는 반상과 적서, 남녀 사이에 차별을 두는 엄혹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19세기 평등을 강조하는 서양의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자 그 영향력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구보는 2024년 9월 10일 비천당에서 거행된 가을 석전제를 지켜보며 유교가 약화한 것은 가르침을 머리로만 취했을 뿐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라고 여긴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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