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마사다 요새 - '결사항전의 상징으로 세계에 각인되다'
1차 유대·로마전쟁서 예루살렘 함락되자
저항세력 해발 400m 헤롯왕 피난처로…
로마, 수개월 돌과 흙 쌓아올려 내부 진입
어른 2·아이 5명 외 모두 사망 참상에 놀라
조상의 결사항전 의지 계승하자는 취지로
이스라엘군 이곳서 새벽 신병 선서식 전통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든지 외적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한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를 갖고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을 하나만 말해 달라고 요청받았을 때, 어느 정도 세계사를 아는 사람은 대부분 이스라엘 사해(死海) 근방에 있는 로마 시대 유대민족 항전 터인 ‘마사다 요새(Masada Fortress)’를 꼽는다. 우리는 통상 ‘요새’라는 말을 들으면 역사 속에서 실제로 끝까지 함락되지 않은 요새는 극히 드문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난공불락’이라는 용어를 떠올린다. 알라모 요새, 여순 요새, 마지노 요새 등 전쟁사에서 등장하는 나름 이름난 요새들의 원조 격이 바로 이번에 살펴볼 ‘마사다 요새’다.
요새에 얽힌 사연은 당시 유대 갈릴리 지방 반란군 지휘관 출신으로 로마제국에서 역사가로 활동한 요세푸스(37~100)가 남긴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 약 75년경 저술)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마사다는 1차 유대·로마 전쟁 중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일부 과격파가 도피해서 장장 3년 이상 항전하다가 로마군의 성벽 돌파 직전에 960명에 달하는 저항군 전원이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마사다 요새는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국방·안보 측면, 특히 정신전력과 관련해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각인돼 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요새 정상과 절벽 주위에 산재한 저수조 및 물 저장 장치, 로마식 욕장과 벽화, 헤롯왕의 계단식 왕궁, 로마군의 마사다 요새 공성용 접근로 언덕 등 고고학 유적지로도 잘 보존돼 있다.
이탈리아반도가 주 활동무대인 로마군은 왜 먼 유대 지방까지 와서 전쟁을 벌였을까?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방에 해당하는 이곳은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이집트 문명권 사이에 자리한 비옥한 회랑지대여서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제국 등 끊임없는 외침과 압제에 시달려 왔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서(急逝)하면서 유대 지방에도 정치적 격변이 몰아쳤고, 궁극적으로 지중해를 가로질러 로마제국이 이곳까지 진출하게 됐다.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제국은 분열되고, 유대 지방은 그리스계 장군이 세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이후 왕조의 극심한 유대교 탄압에 저항한 마카베오 반란(기원전 167)이 성공하면서 유대인은 독립적으로 하스몬 왕조(기원전 142~63)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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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국 말기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전이 발생하면서 로마 개입을 초래했다. 동방 원정 와중에 이 분쟁에 끼어들게 된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유대인이 분열한 틈을 타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유대 지방을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후 로마 지배층 내에서 유대 지방은 지중해 동부 장악 및 통제에 중요한 발판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점차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 아래 놓이게 됐다.
어떻게 해서 유대 과격파는 척박한 마사다의 절벽 위까지 오게 된 것일까? 로마제국의 강압적 지배로 인해 쌓여 온 유대민족의 불만이 마침내 66년에 폭발했다. 예루살렘에서 강경파를 주축으로 한 유대인들이 로마 주둔군을 몰아내고 성전을 장악하자 반란의 물결은 유대 지방 전역으로 퍼졌다. 이처럼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73년)은 유대인들이 로마제국 압제에 저항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었다.
점증하는 반란 세력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보내 이를 진압하고자 했다. 70년 거의 반년에 걸친 치열한 포위 공성전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군은 성벽을 허물고 헤롯왕이 성전산에 세운 웅장한 제2성전마저 파괴했다. 인명 피해도 엄청났다. 수십만 명이 죽고, 살아남은 유대인은 대부분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등 유대인 사회의 붕괴라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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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유대 독립이라면 암살 행위마저도 불사한 극단적 저항 세력인 시카리(Sicarii)파 일부가 예루살렘에서 사해 서안의 마사다 요새로 탈출해 최후의 저항 거점을 구축했다. 해발 약 400m 절벽 꼭대기(길이 600m, 폭 250m의 평지 형태)에 있는 마사다 요새는 원래 헤롯왕이 유사시 피난처로 마련해 놓은 곳이었기에 평소에도 식량, 물, 무기 등이 비축돼 있던 방어작전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번에도 로마는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을 사령관으로 정예 10군단을 파견해 대대적인 함락 작전에 돌입했다(일부 진위 논란이 있으나 공성전 전말은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제7권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마사다 요새는 사면이 가파른 절벽인지라 정면공격이 불가능했다. 로마군은 요새 주위로 약 3.5㎞에 달하는 포위 장벽을 구축해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어 수개월에 걸쳐 돌과 흙을 쌓아 마사다 요새에 접근하는 (오늘날까지 일부 잔해가 남아 있는) 거대한 공성로(攻城路)를 축조했다. 완성된 인공 언덕 위에 각종 공성무기를 배치해 요새를 향해 쉼 없이 커다란 돌덩이들을 날려 보냈다. 마침내 73년 봄 외곽 성곽을 돌파하고 요새 내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요새 안으로 들어선 로마군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안에 있던 유대인 남녀노소 대부분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로마인의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롭게 죽는 편이 낫다”는 지도자 엘라자르 벤 야이르의 설득에 호응해 요새에 있던 사람들이 상호 살해하는 집단자결을 자행한 것이다. 모두 죽고 단지 2명의 어른과 5명의 아이만 살아남아 당시 참상을 증언했다고 한다. 이처럼 마사다 요새 전투는 유대·로마 전쟁의 최후 국면으로 유대인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표상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군은 저 멀리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마사다 요새 절벽 정상에서 새벽녘에 신병 선서식을 거행한다. 남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는 이스라엘에서 조상의 결사항전 의지를 계승하려는 취지일 것이다.
이처럼 마사다 요새는 과거 유대 민족이 최후까지 저항한 장소로서 1948년 독립한 이래 사방으로 아랍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국민에게 국가안보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역사적 기억의 장소로 공헌하고 있다. 솔직히 선조가 남겨준 자랑스러운 국방 유산을 간직한 이스라엘 국민이 매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을 당한 우리 한민족에게도 과연 이러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있는지 곰곰이 자문(自問)해 본다.
오늘날 마사다 요새는 고대 건축과 로마의 공성 전술을 잘 보여주는 유적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고고학 유적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와 고고학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유네스코가 일찍이 2001년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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