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원근법, 지각과 인식

입력 2025. 05. 23   15:47
업데이트 2025. 05. 2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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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사물은 관찰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작게, 가까이 다가와 있으면 크게 보인다. 이런 차이로 사물과 관찰자가 함께 존재하는 장소의 입체감이 발생한다. 그림이란 대체로 평면의 종이나 캔버스 위에 그려 나간다. 3차원 입체를 2차원 평면 위에 그릴 때 멀고 가까운 거리감과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동원되는 기법이 원근법이다. 뒤의 사물은 희미하게 그리고 앞의 사물은 선명한 색채로 처리하는 색채 원근법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원근법은 기하학적 질서를 따르는 선 원근법이다. 

모든 그림이 원근법을 따라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 원근법이 기하학적 질서의 원리에 의해 등장한 건 15세기 무렵이다. 원근법은 렌즈 하나가 달린 카메라를 닮았다. 사물들은 뒤로 배치될수록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돼 결국은 크기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이 원리를 응용해 화가가 사물을 정밀하고도 입체감 있게 그리도록 도와준 카메라 옵스큐라가 일찍부터 등장했다.

한반도에 카메라 옵스큐라가 들어온 건 조선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18세기 후반이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칠실파려안(카메라 옵스큐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정조 시대 궁중화가였던 이명기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그린 초상화를 남겼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민화, 그중에서도 ‘책가도’(책과 책을 꽂은 책장을 그린 그림)를 보면 전면을 작게, 후면을 더 크게 그리는 방식인 역원근법을 사용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작동원리는 물론 우리의 시각이 가까운 사물을 더 크게 감지한다는 보편적인 원리와도 배치된다.

우리 민족이 유전적으로 앞의 사물보다 뒤의 사물을 더 크게 보는 특이한 눈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본다’는 행위에는 ‘지각의 눈’과 별도로 ‘인식의 눈’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가설을 내세울 수가 있다. 원근법에 의지하던 유럽인과 역원근법을 사용한 우리 민족은 사물을 향한 인식의 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원근법도 당대에 새롭게 대두한 인식의 틀을 시지각에 적용한 데 불과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더 신뢰한다. 그런데 인간은 ‘본 것을 믿는다’보다는 ‘믿는 것을 본다’라는 게 최근에는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인식이 지각을 지배한다는 뜻이 된다.

지각과 인식은 일치할 때도 있지만 불일치할 때도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일례가 천동설이다. 고대인들은 태양과 밤하늘의 별이 돌아가는 걸 보고(지각하고) 가만히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별들이 움직인다고 인식했다. 인식의 학문인 수학에 정통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자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돼 지동설을 거둘 것을 명령받았다. 재판정에서는 할 수 없이 천동설을 수긍했지만 재판정을 나설 땐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 오늘날 천동설을 믿는 사람은 없다. 지각과 인식은 불일치할 수도 있다는 걸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다.

말년의 백남준은 당뇨가 심해져 한쪽 눈을 실명했다. 친구인 미술평론가 유준상이 걱정하며 물었다. “남준이, 한쪽 눈을 잃어서 힘들지 않아?” 백남준이 웃으며 응수했다. “준상이, 난 너무나 기뻐. 한쪽 눈만 남으니 드디어 세상이 일목요연하게 보이기 시작했어.” 지각의 눈과 인식의 눈이라는 두 개의 눈이 하나의 눈으로 열린 경지를 백남준은 천연스레 일목요연(一目瞭然)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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