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김준희의 클래식 읽기

목련꽃 그늘 아래서 내 마음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입력 2025. 05. 22   15:45
업데이트 2025. 05. 2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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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의 마이클(마음으로 이어주는 클래식) - 20세기 한국 가곡

1922년 발표된 최초의 한국 가곡 동무생각

일제강점기 한국인 정서 대변한 봉선화
‘동양의 슈베르트’ 이수인 작곡 별·내 마음의 강물
그리움·희망·성찰 등 시대 정신과 감성 담아
100년간 한국인의 삶 노래해 온 귀한 문화자산 

 

작곡가 박태준, 윤용하, 홍난파(왼쪽부터).
작곡가 박태준, 윤용하, 홍난파(왼쪽부터).



우리나라에 서양 음악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였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찬송가와 군가가 전해졌고,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서양식 기보법과 화성법이 국내에 소개됐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지 중 하나가 바로 대구였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대구에 정착하면서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도입됐고, 이는 우리나라 성악과 창작음악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합니다.

대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박태준은 이은상의 시에 곡을 붙여 1922년 최초의 한국 가곡인 ‘동무생각’을 발표했습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명곡으로, 한국 가곡사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박태준이 소년 시절 마음에 둔 친우에 대한 생각을 이은상에게 들려줬고, 그는 대구의 청라언덕에 얽힌 그 사연을 음악으로 그렸습니다.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 한 구절에는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치유의 정서가 절묘하게 담겨 있습니다.

1926년 작곡된 ‘봉선화’(홍난파 곡)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한 곡입니다. 아픔과 서글픔은 ‘울 밑에 선 봉선화’로 표현됐고, 이 노래는 억압된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했죠.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고, 학생 운동 현장에서 불릴 만큼 그 의미는 깊었습니다.

광복 이후 6·25전쟁 시기를 거치며 가곡은 더욱 깊고 절절한 정서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1962, 최영섭 곡)은 이산가족, 실향민의 고통과 금강산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고요한 선율로 표현했고 ‘비목’(1970, 장일남 곡)역시 분단의 아픔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름 모를 병사의 무덤, ‘비석 없는 묘(碑木)’를 통해 전쟁이 남긴 상흔을 노래한 이 곡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잔잔하지만 애달픈 노래입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이 묘사된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1960년 작곡된 ‘보리밭’(윤용하 곡)은 가곡 특유의 서정성에 한국인의 정서를 절묘하게 녹여낸 걸작입니다. 이 곡에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작곡가 윤용하 선생은 부산 자갈치시장 생선 냄새 속에서 이 곡의 멜로디를 떠올렸습니다. 소란한 좌판들 사이, 생선 비린내가 가득한 거리에서 문득 고향의 고요한 보리밭 들판 풍경이 생각났습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이란 소박한 가사 속엔 어머니의 손, 고향 냄새, 어린 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움 속에 태어난 고향 이미지를 담담하게 풀어낸 걸작입니다.

 

‘목련화’(김동진 곡)는 조영식 박사가 젊은 학생과 청년들에게 희망과 꿈, 패기와 기상을 심어주기 위해 지은 시에, 작곡가 김동진 선생이 곡을 붙인 비교적 큰 규모의 가곡입니다. 

이 곡은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은 청춘을 위한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곡은 테너 엄정행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대중가요가 주류를 이루던 1970년대, 가곡의 가치를 다시 되새기게 해준 작품입니다.

‘4월의 노래’(김순애 곡)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로 시작됩니다. 절제된 문학적 언어와 서정적인 선율은 지나간 사랑과 젊은 날의 고요한 추억을 품은, 더없이 아름다운 곡입니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후남(김희애 분)과 결혼한 석호(한석규 분)가 극 중 이 노래를 부릅니다. 석호의 차분한 목소리와 진심 어린 표현이 노래 정서를 한층 깊게 전해주었죠.

1980년대 초,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젊은 감성과 문학을 품은 MBC 대학가곡제를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실험적이면서도 순수한 작품들이 탄생하는 장이었습니다. ‘눈’(1981)은 제1회 대학가곡제에서 발표된 작품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생이었던 김효근이 노랫말을 직접 쓰고 곡을 붙였습니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메조소프라노 조미경이 이 곡을 불렀고, 사랑과 기다림의 감정을 담은 가사를 단정하고 맑은 음색으로 표현해 만장일치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2년 뒤 제3회 대회에서는 또 하나의 걸작인 ‘산아’가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작곡가 신동수가 부친이자 시인인 신홍철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불러주던 이 시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대학 시절 곡을 붙이며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고향을 떠나는 그 시대의 비극을 절절한 선율로 담아내 당시 심사위원과 관객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두 곡 모두 한국 가곡의 새로운 흐름을 열게 된 대표작입니다.

20세기 끝 무렵의 한국 가곡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작곡가가 있습니다. 바로 ‘별’과 ‘내 마음의 강물’로 유명한 이수인 선생입니다. 이수인은 500여 곡의 동요와 100곡이 넘는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맑고 서정적인 선율, 문학적이고 순수한 가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정서를 가득 담은 작품으로 ‘동양의 슈베르트’란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별’은 시조 시인 이병기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느끼는 고요한 사색과 순수한 감정을 섬세하게 나타냈습니다. 또 다른 대표작 ‘내 마음의 강물’은 이수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곡으로, 인생의 희로애락과 세월의 흐름을 강물에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유리알 같은 선율과 함께 깊은 울림을 전하는 이 곡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노래한 서정가곡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수인의 작품들은 동요처럼 부르기 쉬우면서도 그 속에 담긴 자연과 인생, 그리고 그리움에 대한 깊은 정서가 돋보입니다. 맑고 아름다운 선율과 시적인 노랫말로 많은 이에게 위안과 기쁨을 줬습니다.

1922년 ‘동무생각’으로 시작된 한국 가곡의 여정은 시대 아픔과 희망, 사랑과 그리움, 자연과 사람, 인생에 대한 성찰을 음악으로 담아내며 100년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선구적인 작곡가들의 노력과 시대를 함께한 청중의 사랑 속에서 자라온 한국 가곡의 전통과 유산은 21세기에도 이어져 새로운 감성과 시대정신을 반영한 수많은 가곡이 창작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곡이 앞으로의 100년 또한 한국인의 삶을 노래하는 귀한 문화자산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필자 김준희는 연주와 강연으로 ‘대중의 클래식화’를 꿈꾸는 피아니스트다. 저서로 『클래식 음악 수업』 『클래식, 경계를 넘어』가 있으며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필자 김준희는 연주와 강연으로 ‘대중의 클래식화’를 꿈꾸는 피아니스트다. 저서로 『클래식 음악 수업』 『클래식, 경계를 넘어』가 있으며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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