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장충단, 고종 정부의 현충원
조선의 수방사 어영청 분소 있던 곳
을미사변 때 숨진 장병들 추모 공간
이후 문신도 배향…봄·가을에 제사
지금은 대학·체육관·호텔 등 들어서
부패한 왕정에 저항했던 동학농민들
진압하다 숨진 인사들까지 모셔 씁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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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남산국립극장 앞으로 이어지는 버티고개를 넘어가면 왼편에 만나는 공원이다. 구보는 1967년 나온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처음 이 지명을 접했다. 단순한 공원쯤으로 여겼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이곳이 고종 정부의 현충원이었음을 알게 됐다.
현재 장충단 공원은 남산 공원 장충지구의 일부로 관리된다. 원래 조선의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어영청 분소로 한양의 남쪽을 지키던 남소영(南小營) 자리였다. 남소영은 숙종 때인 1695년 남소문 아래에 창설됐다. 궁궐을 수호하던 금위영 소속의 남별영과 아래위로 나란히 위치했다. 두 부대 사이에는 군수창고를 뒀다. 안보를 챙겼던 정조는 자주 남소영을 찾아 무관을 뽑는 별시사를 행했다(『조선왕조실록』).
순조 19년 3월 28일 남소영 화약고에서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어 구보는 그즈음부터 군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조짐을 보인 것으로 짐작한다. 고종 때인 1895년에는 200년을 이어오던 전통의 남소영이 해체됐다. 1900년 그 빈자리에 초혼단(招魂壇)인 ‘장충단(奬忠壇)’이 들어섰다. 장충단은 1895년 8월 19일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 후 그 과정에서 순사한 장병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시작했다.
첫 배향자는 궁궐 훈련대장 홍계훈(1842~1895)과 그 수하들이었다. 홍계훈은 1882년 임오군란 때도 수문장으로서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후 경기 여주로 호송한 공적의 소유자였다. 장충단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제단과 사당, 부속건물은 6·25전쟁 때 불탔다. 장충단 비는 정전 후 다시 세워졌으나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건너편 공원 터로 옮겨졌다. 비명은 순종이 친필로 쓰고 뒷면의 찬문은 민영환이 지었다(『서울육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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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신라호텔 뒷동산에 서서 국립극장, 동국대학교,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타워호텔, 자유센터, 충무초등학교, 남소영광장 등이 들어서 있는 장충단 옛터를 조망하며 40만 평에 이르는 면적이 지금의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버금간다고 느낀다. 한양도성과 묶어 이 공원을 걷는 시민이 많이 눈에 띈다. ‘충(忠)을 기린다’는 의미로 세운 장충단은 신라조와 고려조, 조선조에도 존재했다. 경남 양산의 장충단에 신라 때의 태수 박제상, 고려 때의 장수 김원현, 임란 때의 무관 조영규 등이 배향됐다. 모두가 왜구 침략에 대항해 싸우다가 전사한 무신이었다(『양산시지』).
조선조 말에는 군인묘지도 있었다. 남소영과 이웃한 한강진 뒤편 남산 자락에 있던 이태원 제1묘지였다. 조선시대 군인들은 16세에서 60세까지 복무했다. 1년에 두 달 정도씩 돌아가며 복무했다. 봉급 없이 식량을 배급받았으나 부족해 스스로 호구를 해결해야 했다. “주민들이 남소영 부근 남산 자락의 소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고 있어 금하도록 해야 한다.”(『영조실록』 5년 6월 30일)는 상소가 제기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구보는 그 대목에서 군역도 치르면서 농사도 지어야 했던 장정들의 고충을 읽는다. 군인들은 죽으면 이태원 남산자락 제1묘지에 묻혔다. 군인 공동묘지이긴 했지만, 전사자보다는 평시의 자연 사망자가 많았으므로 ‘현충(顯忠)’의 의미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양 장충단에 처음 배향된 영령들은 내란과 정변 시기에 희생된 무관들이었다. 이어서 을미사변 전인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의 희생자들도 모셔지게 된다. 군란 때 순직한 영의정 이최응, 판서 김보현·민겸호, 참판 민창식과 정변의 희생자 찬성 민태호, 판서 조영하·민영직, 참판 윤태준·이조연, 중관 유재현 등이었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때 순직한 무관들과 순국한 문신들을 위한 사당도 마련됐다(『고종실록』) 37년 12월 28일). 이에 따라 친군무남영 우영관에 임명돼 동학군 토벌에 나섰다가 패하고 죽은 전 곤양군수 이경호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이곳 장충단에 배향됐다(『유방집』). 또한 백성기가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상소를 올리면서 을미사변 때 희생된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종 임최수, 참령 이도철 등 문신과 시종들도 전사한 장병 못지않은 순국 충렬의 인사로 평가받아 함께 모셔졌다(『고종실록』 38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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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최수와 이도철은 1895년 10월 11일 춘생문 사건 때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이어(移御)시키고, 김홍집 내각을 타도하려다가 체포돼 11월 15일 특별법원 판결에 따라 교형에 처해졌다가 후에 충신 반열에 올랐다. 이어 일제의 국권피탈이 불법임을 국제사회에 호소한 열사들이 추가됐다. 고종은 장충단 주위에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이 최초의 국립현충원은 곧 그 의미를 상실했다. 국권을 일본에 뺏기면서 일본인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해 갔다. 순종 2년 11월 4일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커지면서 1908년 이곳에서의 제사가 중단됐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자 일제는 이곳에서 추모회를 가졌다. 일본은 1910년 8월 장충단을 폐사하고 1919년부터 벚꽃을 심어 이 일대를 일본인의 공원으로 만들었다. 1920년에는 장충단 비석을 뽑아버렸다. 1932년 상해사변 당시에는 결사대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동상을 세웠다. 이토 히로부미의 원찰인 ‘박문사(博文寺)’도 지었다. 현재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였다.
광복 후 일제의 흔적은 모두 철거됐다. 장충단비는 196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1959년에는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2가에 놓여 있던 수표교가 통째로 이곳으로 옮겨졌다. 구보는 장충단비도 수표교도 서로 놀랐을 듯싶다고 여긴다.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다른 사연을 간직했던 두 존재가 갑자기 한 공간에서 마주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구보는 장충단 비 앞에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다 숨진 인사들까지 충신 반열에 올리는 건 어색하다고 여긴다. 고종에게는 충신이었겠지만, 그들이 맞서 싸운 대상이 나라의 적이 아니라 무능하고 부패한 왕정에 저항한 사람들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이곳을 ‘호국의 길’로 여기거나 ‘첫 국립현충원’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고종 정부의 현충원’이었을 뿐이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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