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서울에서 근무하며 아내와 교제했다. 꼭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아내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앞으로도 지방보다 서울에서 근무할 가능성이 크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면서 ‘나중에 지방으로 가게 되면, 그때 자연스레 사정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여겼다.
결혼 후 충남 계룡시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그곳은 비교적 생활하기 용이한 곳이어서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당시 아내는 둘째를 가진 상태에서 첫아이를 양육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만 근무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아내에게 “근무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방부 명령인 걸 어떻게 하냐”고 답했다. 상황을 모면해 보려 했지만, 아내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직업군인 중 주말부부로 지내는 경우도 상당수 있어 우리는 이를 한 방안으로 고려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가족은 꼭 함께 살아야 한다”는 뚜렷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나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혼자 생활할 자신이 없었다. 아내는 고심 끝에 직장을 그만뒀다.
뒤돌아보면 당시 아내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사회생활을 하며 보람도 찾고, 두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며 잘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고, 아는 사람도 한 명 없는 지방으로 가야 한다는 것. 게다가 본인이 그 선택에 조금도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지방행을 택해 준 아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의 첫 번째 지방 생활은 계룡이었지만, 이후 여러 차례 옮겨 다녔다. 이사를 정말 자주 다닌 분들에 비하면 많지 않지만, 이사 자체가 주는 부담감은 모든 군인가족에게 매우 크게 다가올 것이다.
단순히 짐과 거처를 옮기는 정도가 아니라 온 가족이 새로운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해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과도 같아서다.
지방 생활을 하면서 아내에게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운전을 하게 됐다. 겁이 많은 아내가 운전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운전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데려다줄 수 없고, 시장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몇 차례 도전 끝에 운전면허를 따냈다.
운전을 하며 여러모로 가정의 필요를 채우는 아내가 고맙지만, 여전히 복잡한 시내 주행이나 고속도로 운전은 엄두도 못 내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변화에 적응하는 일’은 부부만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이별이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이사는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친한 친구와 헤어져야 할 때면 아이들에게 “휴대전화로 친구들과 언제든 연락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라고 토닥였다.
직업군인 가족의 삶은 늘 새로운 도전과 함께한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인이 앞서 나가 싸워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가족도 어려운 환경과 싸워 이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군이 건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모든 군인가족이 수많은 도전을 잘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쳐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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