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역사 - 꽃피는 5월, 결혼예복 변천史
조선, 연꽃 자수 활옷에 연지곤지
中 ‘붉은 치마’ 번성과 기쁨 뜻해
日 12겹 비단 겹쳐 입어 신분 강조
사회마다 ‘정절·다산·가문’ 상징
‘19세기 군주’ 빅토리아 여왕
순백색 실크 새틴 드레스 보편화
전통보단 모방·소비의 결과물
꽃이 만개한 5월은 결혼의 계절이다. 정장을 입은 하객들, 피아노 선율에 맞춰 천천히 입장하는 신부, 신부의 걸음을 따라 흐르는 길고 하얀 드레스. 이러한 결혼식장 풍경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런데 언제부터 흰색 드레스가 이리도 일상적인 풍경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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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의례 중 하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도화하고, 두 개인을 사회의 새로운 단위로 편입하는 장치다. 이런 통과의례에는 늘 상징적인 옷, ‘결혼 예복’이 있다. 이때 결혼 예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역할과 규범을 시각화한 상징적 도구였다.
신부복은 특히 그러했다. 과거 여성은 늘 ‘누군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혼례복은 그 호칭의 의무를 색과 형태로 표현했다. 어떤 사회에선 정절을, 어떤 사회에선 다산을, 어떤 사회에선 가문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혼례복은 그 시대가 여성에게 기대한 개념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특히 계급사회에서 신부의 옷은 색, 문양, 천, 장신구를 통해 신분과 권력 구도를 암시했다.
오늘날 보편적인 신부의 흰 드레스로 인식되기 이전 세계 각지의 결혼 예복은 훨씬 다양했다. 당대 신분제와 혼인제도, 종교와 경제구조가 실과 색으로 얽혀 드러났다.
동양의 혼례복을 살펴보면 중국은 혼례복에 그 상징성과 위계가 강하게 반영됐다. 당나라 시기 신부는 연둣빛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었다. 연두색은 젊음을, 빨간색은 번성과 기쁨을 뜻했다. 강렬한 색 대비는 길일(吉日)에 맞춘 것이며,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어깨에는 피박을 걸쳤다. 명나라에 이르면 의례가 더 엄격해진다. 신부는 붉은 단령(團領)을 입고, 머리에는 봉관(鳳冠)을 썼으며, 허리에는 하늘빛 요대(腰帶)를 둘렀다.
청나라에선 만주식 혼례복이 자리 잡는다. 신부는 붉은색 실크 단령을 입고, 머리에는 대형 금속 장식이 얹힌 화관(花冠)을 썼다. 복식 위에는 용과 봉황이 금실로 수놓아졌으며, 신랑 집안 지위에 따라 장식 수와 무늬가 달라졌다. 지역에 따라 만주식 차림새를 따르기도 했으나 한족 사람들은 종종 이전 명나라 때의 관습을 일부 계승했다.
중국과 이웃한 한반도는 삼국 통일 이후 예복이 명확히 정형화된다. 고려 시대 왕실 혼례에서는 붉은 비단에 봉황과 연꽃 문양이 수 놓인 활옷이 사용됐다. 머리에는 화관, 얼굴에는 연지곤지를 찍었다. 조선 전기엔 녹색 원삼이 중심이었고, 붉은 치마와 금박 장식이 더해졌다. 족두리와 긴 비녀로 머리를 정리했다. 조선 후기에는 활옷이 더는 상류층 여성만의 복식이 아니었고, 민간에서도 혼례복으로 널리 입혔다. 색은 점차 강렬해졌고, 붉은 치마와 녹색 저고리의 조합은 생명과 번영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궁중에서는 용과 봉황 문양이 계층을 구분하는 권위의 표시였고, 민간에선 유사한 형상을 장식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시대마다 결혼복이 달라졌다. 헤이안 시대 귀족 여성은 주니히토에를 입었다. 비단 열두 겹을 겹쳐 입는 복식이다. 20㎏ 정도의 무게로, 색의 순서·배합이 신분과 교양을 의미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전통 결혼 예복,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옷감을 사용하는 ‘시로무쿠(白無垢)’가 등장한다. 이것은 새 신부가 시가의 가풍에 잘 적응하라는 의미다.
서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는 셀주크와 오스만을 비교할 수 있다. 셀주크 시대에는 실크 카프탄과 금속 동전이 달린 베일을 썼고, 복식 위에 기하학 문양을 새겼는데, 이는 부족 동맹과 권위 체계를 드러낸다. 오스만 제국 혼례복은 ‘빈달르’라고 불리는 벨벳 가운이 주류였다. 짙은 자주색과 남색에 금실 자수가 놓이고, 머리엔 실크 터번이나 화려한 머리핀이 꽂혔다.
아프리카는 지역별 문화 상징이 결혼복에 집약됐다.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여성은 ‘아소오케’라 불리는 직물을 몸에 두르고, 머리엔 ‘게레’라는 머리 싸개를 했다. 붉은 이로, 상의 부바, 산호 목걸이로 부의 상징을 더했다.
서유럽에서도 오늘날과 같은 흰 드레스는 드물다. 이탈리아는 색의 대비가 가장 뚜렷한 곳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여성은 금실 레이스가 놓인 진홍색 벨벳 드레스, 브로케이드 머리장식, 금목걸이를 착용했다. 바로크 시기 베네치아는 더욱 호화로웠다. 은사 브로카텔라 가운, 산호·진주 장식, 길게 끌리는 트레인이 기본 구성이었다.
복식 트렌드를 선도한 프랑스의 경우 15세기 부르고뉴공국 여성은 진홍색 호블락(houppelande)과 금실 벨트를 착용했고, 모피 트리밍이 신분을 분명히 했다. 18세기 로코코 시기엔 파스텔 실크의 로브 아 랑글레즈가 혼례복으로 쓰였고, 풍성한 레이스와 리본, 코르셋으로 꾸며졌다.
1840년 훗날 ‘19세기를 소유한 군주’라고 불리게 될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식이 있었다. 재위 3년 차에 접어든 젊은 여왕은 자신의 결혼식에서 순백색 실크 새틴 드레스를 입었다. 디자인은 그녀가 직접 지시했고, 드레스에 들어갈 레이스는 영국 레이스산업의 상징인 ‘호니튼’에서 만들었다. 드레스는 단순했으나 길고 하얗게 흘렀다. 이는 당대 통념을 벗어나는 혁신적 선택이었다. 당시 유럽 상류층은 혼례복에 진홍색, 금사, 검은 벨벳 등을 선호했다.
그렇기에 여왕이 선택한 순백의 드레스는 전례 없는 ‘모범’이 돼 점차 대중적인 모방으로 확산됐다. 잡지에 실린 그림, 신문 기사 등의 인쇄매체를 통해 귀족 여성들이 먼저 흉내 냈고, 시간이 흐르며 중산층도 따라 했다. 이로 인해 백색은 부의 상징이 됐다. 동시에 순결, 정절, 헌신 같은 상징이 후대에 덧씌워졌다. 물론 빅토리아 여왕 자신은 그런 의미를 의도하지 않았지만 후대의 산업, 종교, 중산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가 그 의미를 창조해 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흰 드레스는 영화와 함께 세계로 퍼졌다. 열강에 막 들어선 일본도 기존 시로무쿠를 응용해 이 흐름에 적극 동참했다. 할리우드의 결혼 장면은 늘 새하얗고 눈부셨고, 전쟁 후 산업화된 신부복 시장은 이 환상을 적극 판매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국가가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하자 흰 드레스는 더는 귀족 특권이 아니라 누구나 차용할 수 있는 규범이 됐고, 어느 순간 ‘모두의 당연한 일상’이 됐다. 그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세기 중반 이후 100여 년에 걸친 모방과 소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흰 드레스는 보다시피 전통이 아니다. 반복된 선택이 만든 관습이다. 누구든, 무엇을 입든, 자기 목소리를 담았다면 그것이 곧 결혼 예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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