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오면 다시 만날 그들을 기다리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빛바랜 앨범을 꺼내 보고 추억으로 빠져든다. 포연 자욱한 사진 속 대한민국에서 포탄을 제일 많이 쏘는 포대라는 자부심 가득한 용사들이 대포 앞에서 어깨동무하고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40년 전,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휴가 간 김모 병장이 귀대시간을 넘겼다는 당직사관의 보고를 받았다. 그와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부모님의 불화, 동생의 가출, 열악한 환경으로 좌절을 겪었을 그를 위로하며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보자고 약속했었다. 그의 최근 행적과 고향 마을 이장의 전언을 비교해 한 가닥 희망을 찾아냈다. 영영 귀대하지 않거나 극단적 선택을 한다면 포대는 만신창이가 될 게 뻔했다. 절박했던 순간, 당당하게 말했다. “틀림없이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함부로 행동할 친구가 아니다.”
마냥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돌아오겠지. 사나이끼리 약속인데’. 중얼거리면서 포대 입구로 나왔다. 막사 쪽에서 행정병 구모 상병이 뒤따라왔다. 밤하늘 가득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구 상병, 저 별 보이나? 길 잃은 자를 안내하는 샛별이다.” “예, 보입니다.” “저 별들이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12년 걸린단다.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우리는 먼지만 하지. 서로 믿고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자.”
시간이 흐르고 다다닥, 군홧발 소리가 들려오더니 구 상병이 소리쳤다. “김 병장님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몹시 초췌해 보였다. “포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래, 지금은 아무 말 안 해도 돼. 어서 들어가자.”
날이 밝은 뒤 진술서를 읽어 봤다. ‘마을 숙부님 댁에 들러 집안 소식을 들었다. 부모님은 헤어졌고, 집은 팔렸다. 소록도에 갔다가 나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포대장과의 약속이 생각나 급히 귀대했다’는 내용이었다. 대대장에게 이제 막 시작한 지휘관으로서 사람 관리를 잘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담아 보고했고, 사건은 포대장 책임하에 처리하도록 위임받았다.
이튿날, 김 병장은 장기복무 지원서를 제출했다. 생각해 보니 돌아갈 집도 없고, 포대장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직업군인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김 병장은 곧바로 하사로 임용됐다. 10년쯤 지난 뒤 소령과 상사 계급을 달고 만났다. 듬직한 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몇 해가 흐른 후에는 중령으로 전역해 민간인이 됐고, 그는 어엿한 원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젊은 시절 나눈 약속을 잘 지켰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악수하면서 서로의 인생을 축하해 줬다.
밤하늘 별들이 우주를 세 번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긴 세월 동안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오늘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만날 그들을 기다리며 행복한 하루를 귀한 선물처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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