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산 - 종교 성지, 끝없는 전쟁터로 변하다
다윗왕, 새 수도에 제1성벽 쌓고
유대인 느헤미야가 제2성벽 세워
예수 탄생 무렵 헤롯왕, 3중 개축
오스만제국 시대 현재 모습으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성지’
‘성전산’ 품고 있어 분쟁 발원지로
구시가지 포함해 ‘문화유산’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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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초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뉴스가 방송매체를 타고 삽시간에 지구촌을 달궜다. 바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향후 재건을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미국이 소유한다”는 폭탄성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마무리돼 가는 와중에 나온 발언인지라 파급력은 엄청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란한’ 출현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중동 땅에서는 20세기에만도 여러 차례 전쟁이 터졌다. 당연히 지금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끝날 듯 말 듯한 ‘혼종적’ 상황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1차 세계대전 이전 발칸반도처럼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라 칭하는 데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중동지역에서 전쟁이 빈발하고 있는 근원적 요인은 무엇일까? 그 중심에 이번 주제인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산(聖殿山)이 있다. 현재 불완전하게나마 예루살렘 유적지를 감싸고 있는 성벽은 16세기 오스만제국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는 고대 유대·로마 전쟁 시기 성벽을 기초로 1535~1542년에 오스만제국 술탄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 재건됐다. 전체 둘레 길이가 약 5㎞(높이 10~15m)에 8개의 출입문이 있는 현존 성벽은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에워싼 채 도심에 있는 4개의 주요 지구(유대인 지구, 무슬림 지구, 기독교인 지구, 아르메니아 지구)를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루살렘 성벽의 축성 역사가 매우 장구(長久)한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인의 고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다양한 민족에 의해 축성, 개수, 보강돼 온 성벽은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성지로 알려진 예루살렘의 진정한 수호자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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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古都) 예루살렘에 처음 성벽(제1성벽)을 세운 인물은 유대민족 전성기를 이끈 다윗왕이었다. 그는 기원전 10세기경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고, 신생 수도 방어를 위해 도시를 에워싸는 성벽을 쌓았다. 하지만 다윗왕이 축성한 성벽은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로니아 제국 군대 침공 때 파괴됐다.
이른바 ‘바빌론 유수(幽囚)’로 유대의 엘리트들이 먼 곳 바빌론으로 끌려간 후 성벽은 무너지고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했다. 기원전 539년 새롭게 등장한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릴 때까지 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때 페르시아 제국의 유대인 출신 고관이던 느헤미야가 귀향 유대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세운 것이 바로 제2성벽이었다.
누가 뭐래도 예루살렘 성벽 축성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기원전 1세기경이었다.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방을 차지하면서 로마 당국에 의해 예루살렘 지역 통치자로 임명된 헤롯왕이 기원전 37~34년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벽(제3성벽)을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바로 그 시점에 헤롯왕은 예루살렘을 대대적으로 재건하고, 도시 방어를 위해 성벽을 삼중 체계로 개축했다. 여기에 헤롯왕의 손자이던 유대왕 헤롯 아그리파 1세가 기원 41~44년에 로마 황제의 허가를 받아 조부가 축성한 성벽을 확장·보강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시 공간 확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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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제국이 허락했기에 등장한 바로 그 성벽이 1차 유대·로마 전쟁(기원 66~73년) 시 중요한 요새 역할을 했다. 기원 70년 티투스 장군이 이끈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한 채 첨단 공성 장비를 대거 동원해 거의 반년에 걸친 혈투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때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오늘날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벽만 남기고 모두 파괴했다. 이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제 역할을 상실한 채 겨우 명맥만을 이어온 성벽을 1530년대에 그나마 현재 모습으로 보수·재건한 인물은 앞서 언급한 오스만제국의 술레이만 대제였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시가와 성벽의 철저한 파괴를 초래한 유대·로마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로마제국의 지배·수탈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기원 60년대 중반 이래 산발적으로 이어진 유대인의 저항이 65년경 대규모 반란으로 폭발했다. 막강한 로마군의 진압작전에 밀린 유대 반란군은 66년 예루살렘으로 집결해 성벽을 방패 삼아 끈질기게 방어전을 펼쳤다. 수년간에 걸친 포위 공성전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은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티투스 장군의 로마군에 의해 70년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성벽은 물론 내부에 있던 헤롯왕의 제2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 시가지 전체가 초토화됐다.
그렇다면 전체 2㎢에 불과한 성벽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어디였을까? 바로 오늘날에도 중동 테러 관련 뉴스에 간혹 등장하는 성전산(Temple Mount)이다. 왜 그럴까? 이곳은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라는 세계 3대 종교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지이기 때문이다.
성전산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솔로몬 성전이 건립된 곳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교 신자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다. 유대교 성전은 파괴와 복구를 반복하다가 기원 70년 로마군에 의해 최종적으로 파괴됐다. 이후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들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쪽 벽, ‘통곡의 벽’에 이마를 찧으며 성전 재건을 염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7세기 중엽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후 8세기 들어 성전산에 이슬람 사원(알아크사 모스크와 황금돔)을 건립한 것이다. 성전산 남쪽 끝머리에 있는 알아크사 모스크는 이슬람교에서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성지로 여겨진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이곳은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해 하늘에서 하나님과 만난 장소다. 그래서 알아크사 모스크 바로 옆에는 무함마드의 승천을 기념하기 위해 8세기에 건립된 ‘돔의 성소’가 자리하고 있다. 황금빛 지붕으로 유명한 이곳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로 손꼽힌다. 이처럼 두 종교의 성지인 성전산은 관할권을 놓고 오늘날까지 종교적 갈등과 정치·군사적 충돌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제국과 힘센 통치자들에 의해 건설됐다. 최초로 다윗 왕이 쌓은 성벽부터 헤롯왕과 로마제국, 오스만제국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길고 복잡하다.
오늘날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대면할 수 있는 성벽은 1500년대 중반 오스만제국 시대에 축성된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적어도 3000년 동안에 걸쳐 겹겹이 쌓여온 예루살렘 성벽의 장엄한 역사가 숨 쉬고 있다. 긴 역사 속에 담긴 소중한 가치를 인정한 유네스코가 1981년 예루살렘 성벽과 그에 둘러싸인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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