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행복의 정의

입력 2025. 05. 13   15:18
업데이트 2025. 05. 1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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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동 오즈세파 대표
오계동 오즈세파 대표



미국의 영화배우 에단 호크는 배우로서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좇는 일의 조화가 쉽지 않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가질수록 더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직도 확실하게 행복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도 덧붙였다. 

실제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건 반세기가 채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행복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고 했다. 영어로 ‘happiness’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어는 ‘eudaimonia’로 ‘훌륭한 영적 존재’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 용기, 관용, 우애 등이 포함된 뛰어난 인간의 삶이 곧 행복한 삶이라고 말했다. 뭐,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살면 좋고, 아니면 어쩌겠는가?

누구에게나 맞는 행복의 정의는 없다. 공학에선 개념 정리가 되지 않으면 연구를 시작할 수 없다. 개념 정리에는 먼저 개념을 표현할 용어의 정의가 있어야 하고, 개념을 발전시키고 실천할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우리 각자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먼저 본인이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개념 정리가 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기에 도달했을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행복한 상태임을 알 수 있고,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평생 가족을 외면한 채 바깥일에 골몰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행복을 삼시 세끼 입에 밥숟가락 갖다 대듯이 얘기하지만, 정작 자기의 행복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이에 타인의 행복 개념을 내 것인 양 받아들여 사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건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주변 지식이다. 가장 크게 친구나 지인, 좀 더 확대하면 매스미디어가 조장하는 행복론이다.

매스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복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다. 매스미디어는 불행과 선동을 기반으로 먹고산다. 주요 매체가 전하는 세상의 소식은 불행을 퍼나르는 데 여념이 없고, 욕망을 부추기지 못해 안달이다. 터지는 게 사고요, 세상의 한 줌도 안 되는 셀러브리티의 삶만 강조되고 조명된다. 우리 인생에 그들의 삶이 뭐가 중요하다고 매일 그렇게 쏟아 낼까. 이는 우리 DNA가 불행과 자극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착한 소식만 전하는 것을 모토로 창간한 미국의 어느 신문은 불과 몇 달 만에 문을 닫기도 했다. 안 팔리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얻는 행복의 개념은 내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그 좋은 자유까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남에게 의지하겠는가. 가지면 행복하겠고(가지면 행복해질지 사실 잘 모른다), 오르면 기쁠 것이다(세상에 가장 높은 자리는 한 자리뿐이다). 이런 가볍고 본능을 추구하는 것들로 행복의 로드맵을 짠다면 안 봐도 그 끝을 알 수 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자신이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을지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보다 빠르게 행복에 다가갈 수 있고, 그곳에 다다랐을 때 즐길 수 있다.

타인의 행복을 따라가는 건 남의 삶을 사는 것이고, 끝없이 이어진 기찻길을 걷는 것과 같다. 달리다 보면 주변 경치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단지 달려드는 두 줄의 철선과 침목만 보일 것이다. 연료가 바닥나면 어느 순간 멈춰 멍하게 달려온 길을 되돌아볼지도 모른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게 황량한 철길만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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