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홍현, 풍운아 김옥균 옛 집터
흙색이 붉어 ‘홍현’이라 불렸던 고개
정독도서관 뜰에 역사 알리는 표지석
19세기 끝자락 젊고 유능한 인재 모여
시대가 부여한 소명에 삶을 불태운 곳
어쩌면 국운을 돌릴 수도 있었을 신념
혁명은 꺾이고 주인 잃은 터만 남겨져
서울 종로구 화동 22번지 정독도서관 남쪽 고개는 붉은 흙색 때문에 붉은 재, ‘홍현(紅峴)’으로 불렀다. 그 이름을 이으려는 듯 큰 둘레의 도서관 담장을 허문 틈새 공간에 붉은 벽돌 공공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과 서재필이 이 도서관 부지에 살았다. 조선 초기 사육신 성삼문도 이 공간 출신이었다. 모두가 정치현상을 바꾸려 했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구보는 도서관 입구에 서 있는 키 큰 회화나무들에서 이 공간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다. 갑신정변 후에는 몰수돼 호조참판이던 박제순이 소유했다. 1900년 고종의 칙령으로 관립한성중학교(경기고 전신)가 자리 잡았다가 1977년부터 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넓은 풀밭은 시민의 휴식공간이 됐다.
구보는 ‘김옥균 집터’ 표지석 앞에서 19세기 말 시대가 부여한 소명을 좇았던 한 풍운아의 일생을 되짚어 본다. 김옥균(1851~1894)은 한민족 사상 최초로 왕정을 종식하려는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몰락한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7세 때 천안에 사는 당숙에게 입양돼 자랐다. 1872년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승정원일기』, 고종 9년 2월 4일). 그해 12월 흥선대원군이 10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오면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 김옥균은 개화의 기회로 판단했다. 봉건제도의 모순과 외국 세력의 침투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화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소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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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요직에 두루 등용되며 재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1881년부터 3년간 통상사절로서 일본을 돌아봤다. 일본의 문물을 살피고 주일 외국대사관들도 방문해 그 결과를 고종에게 보고했다(『사화기략』). 김옥균은 홍현 가까이에 살던 박규수,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연암전집』을 교재로 삼아 학습하며 본격적인 개화운동에 돌입했다. 점차 정치세력 확보와 군제 개혁, 정부기구 개편, 산업진흥책 추진, 언론사 창간 등이 개화에 꼭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갖게 됐다.
김옥균은 “제도 개혁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성순보’ 등에 게재했다. 임오군란 후 동남제도개척사라는 외직으로 밀려나 있을 때도 고래잡이에 관심을 기울였다(『승정원일기』 고종 20년 3월 16일). 그 일환으로 독도에 출몰하던 일본 어선을 경계하고, 우리 어민을 독도에 정착시켜 영토로 못 박았다.
문벌이나 세도가 중심의 당파성에서 벗어나 넓은 계층의 인사와 접촉했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영효, 박영교, 유길준, 서재필, 서재창, 지석영 등이었다. 대부분 노론 계열이었고 ‘엘리트’였다. 젊은 그들은 제도 개선과 세도 인사의 탄핵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일본 수신사나 중국 영선사로 다녀오며 얻은 선진문물을 국내에 소개했다. 이렇게 개화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굳히며 조선 사회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개화당 연구』, 이광린).
사회가 점점 난맥상을 보이자 개화파의 ‘세상 바꾸기’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그 신념의 요체는 ‘국민국가 수립’이었다.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긴 일이 ‘일본 학습’이었다. 김옥균은 1879년부터 개혁의 동량을 확보하기 위해 유길준과 윤치호, 서재필 등을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 보냈다. 서재필은 1884년 게이오의숙을 거쳐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서재필전기』). 지석영은 소에게서 백신을 얻는 우두종법을 배워 와 조선의 천연두 예방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승정원일기』 고종 39년 11월 21일). 윤치호는 1881년 17세부터 2년간 도쿄 동인사(同人社)에서 수학하며 일본의 근대화를 학습했다. 개인적 노력으로 일어와 영어를 배워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이노우에 가오루 등 일본 지식인과 교유하며 앞선 생각들을 접했다(『윤치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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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사비를 들여 승려 이동인을 일본에 보내 정보를 수집하게 하는 열정도 보였다. 김옥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사는 일본 체류 시 교류한 신지식인들이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이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특히 김옥균과 각별했다. 그는 막부 말기에 오사카와 에도(도쿄)에서 서양 학문을 접하고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의 지론은 ‘국민국가 수립’이었다. 에도 말기 막부에 속해 있을 때는 막부가 다이묘를 해산시키고 국민국가로 태어나는 방안을 생각하기도 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치로 내거는 개혁파도 쳐다봤으나 양측 모두 신국가 수립의 싹을 보이지 않자 1868년 게이오의숙을 세워 청년 교육에 전념했다(『명치천황』, 도널드 킨).
그는 “빈부와 강약은 나라마다 처지가 다른 까닭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결코 국가의 권리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는 인식하에 “강대국이 약소국에 압박을 가하는 것은 죄악(『학문을 권함』)”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사상은 약소국 조선의 개화파 청년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개화파는 “독립이라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자기가 지배하고,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말한다(『학문을 권함』)”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가르침에 크게 공감했다.
그의 ‘일신독립 일국독립(一身獨立 一國獨立)’은 “개인의 독립이 있은 연후라야 국가의 독립이 있다” “국가의 근대화에는 시민적 자유를 향유하는 개인의 형성이 선행돼야 한다(『명치라는 국가』, 시바 료타로)”는 가르침을 담고 있어 김옥균 등에게 국민이 주인인 국민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 줬다. 김옥균은 늘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했는데, 그 신념이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더욱 공고해졌다. 500년간 명·청의 번(番)으로 지내 오던 조선의 지식인으로선 처음으로 자주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갖고, 청의 동향을 면밀히 관찰해 자주독립의 타이밍을 잡으려 했다(『소앙집』).
김옥균은 그런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 1884년의 갑신정변이었다. 구보는 이 혁명이 실패로 끝난 걸 늘 아쉬워한다. 조선의 마지막 자력갱생 기회가 고종의 요청으로 입국한 청군에 진압됨으로써 물거품이 된 까닭이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김옥균 개인의 비극을 넘어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피살당한 뒤 서울로 옮겨져 부관참시됐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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