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이솝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빛나는 서사
한 이야기꾼의 여정이자 모두의 인생
세상 모든 이야기를 향한 뜨거운 헌사
모든 배우 멀티 캐릭터 자연스럽게 소화
무대조명에 상징적 장면 어우러지며
몸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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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이솝? 애들 교과서에 구색 갖추기처럼 끼워진 그 이솝? 토끼랑 거북이, 사자와 쥐, 신포도 여우 이야기가 나오는 그 이솝? 이솝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한단다. 그런데 아동극이 아닌, 엄연한 어른용 뮤지컬이란다.
공연장인 대학로 예스24 스테이지 앞은 봄 미세먼지를 뚫고 이야기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솝이 이렇게 인기 있는 캐릭터였던가. 반신반의하며 공연장에 들어섰는데, 100분이 지나고 나서는 완전히 설득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단순한 우화의 나열이 아니라, 한 이야기꾼의 진심 어린 여정이자 지금 우리의 이야기였다.
무대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온통 푸른빛으로 물든 원형 무대는 투덜이와 스머페트가 튀어나올 듯한 스머프 마을을 떠올리게 했다. 중앙에는 커다란 문이 서 있고, 양옆으로는 작은 문이 하나씩 자리했다. 휴대전화 끄기와 비상문 위치를 알리는 직원의 멘트가 깜짝 놀랄 만큼 우렁차 막이 오르기도 전에 공연이 시작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직원은 혹시 제작사가 숨겨둔 배우로, 극 중 깜짝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지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뮤지컬 ‘이솝이야기’는 이름만 이솝일 뿐 이야기의 주인공은 티모스라는 소년이다. 2600년 전 그리스 사모스섬. 노예로 태어난 티모스는 불의의 사고로 주인집 딸 다나에와 같은 흉터를 얼굴에 새기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둘은 친구가 된다. 두 아이는 완고한 다나에의 아버지 몰래 밤마다 모여 갖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행복은 언제나 질투를 부르는 법. 불행의 신이 이 둘을 갈라놓고, 티모스는 아테네로 끌려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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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돌아올게. 어떻게든.”
티모스는 그렇게 다짐하고, 이야기를 품은 채 다른 세상으로 떠난다. 아테네 상인 시타스의 노예로 팔려 가지만 뛰어난 재치와 순발력으로 주인에게 부를 안기며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다나에가 기다리는 사모스로 돌아가 다시 함께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이야기. 이렇게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훗날 ‘이솝우화’로 이어진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는 발상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다.
티모스를 연기한 윤은오는 싱싱하게 살아 뛰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이야기꾼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다. 그의 입이 열릴 때마다 관객들은 숨죽이고 기다리게 된다. 뚜렷한 발성과 감정을 머금은 목소리로 무대를 촘촘히 채웠는데, 특히 애절한 넘버 ‘돌아갈게’를 부를 때에는 극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티모스를 제외한 모든 배우가 멀티 캐릭터를 소화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다나에 역의 송상은은 아테네 상인 시타스로 변신한다. 목소리, 걸음걸이, 눈빛까지 완전히 달라진다. 전환이 너무 자연스러워 눈치 없는 관객이라면 같은 배우인지 모르고 넘어갈 정도다. 이형훈 역시 다양한 배역을 오간다. 장터 상인이었다가 왕이 되고, 다시 늙은 노예 페테고레가 되어 티모스 곁을 지킨다. 그는 특유의 B급 감성과 유쾌한 농담으로 극에 리듬감을 불어넣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대지 위스퍼를 맡은 강연정의 연기는 늘 신뢰감을 준다. 친구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티모스의 여정에 동행하는 역할이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배우답게 장면마다 온도를 달리하며 이야기의 균형을 잡았다. 물 위스퍼의 이휴도 좋다.
무대 조명도 제대로 한몫해 낸다. 밤바다처럼 반짝이는 바닥, 허공 가득 펼쳐지는 별들, 여기에 배우들이 몸으로 만들어 내는 상징적인 장면들이 어우러지면서 이 작품은 ‘몸으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된다.
티모스, 다나에, 위스퍼들이 부르는 ‘푸르고 푸르고 푸른 밤’은 공연 초반 최고의 하이라이트. 어린 티모스와 다나에가 몰래 집을 빠져나와 바다를 마주하는 순간, 조명이 잔잔하게 깔리며 두 사람의 꿈이 바다 위에 아련히 새겨진다.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노래를 통해 객석으로 전달되는데,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진다.
‘티모스의 무지개’는 티모스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한 넘버다. 절망 속에서도 빛을 놓지 않겠다는 소년의 마음은 아테네의 황량한 거리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마지막 넘버 ‘유리병 속 모래 이야기’는 이 공연의 모든 메시지를 압축한다. 두 사람이 손에 쥔 작은 모래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설정은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 조용히 유리병을 바라보는 짧은 장면만으로도 이 작품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임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뮤지컬 ‘이솝이야기’는 이처럼 단순히 이솝우화를 무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다. 우화를 재해석한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에 대한 헌사처럼 들린다. 삶은 만남과 이별, 상실과 꿈을 통해 이어지는 긴 이야기. 누군가의 기억, 상상, 고백, 약속들이 작은 모래알처럼 모여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길. 무언가 소중한 것을 하나쯤 움켜쥐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유리병 속의 작은 모래알 하나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가 싹을 틔워 쑥쑥 자라날 수 있기를. 우선 당장은 이 글이 독자의 눈과 귀에 ‘쓸모 있는 이야기’로 가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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