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부처의 발걸음으로 궁궐 나온 왕자 왕좌보다 높은 천국에 우러러 올라

입력 2025. 05. 01   16:40
업데이트 2025. 05. 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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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연주암, 효령대군의 공간 

피바람 끝에 왕이 된 아버지 마음 읽고 
동생 충녕 등극 축원하며 관악산으로…
깊은 불심으로 유교 사회서 불교 숭상
연주암 효령각 ‘곤룡포 영정’으로 남아

관악산 연주대. 필자제공
관악산 연주대. 필자제공

 


구보는 경기 의왕 쪽에서 과천으로 진입하면서 마주하는 관악산을 대할 때마다 압도감을 느낀다. 632m 높이의 관악산은 백악·치악·감악·송악과 더불어 ‘오악(五岳)’을 이룬다. 맑은 날이면 개성 송악산과 인천 송도도 조망된다. ‘갓 모양으로 높이 솟은 산’이라 해서 ‘갓뫼’ 또는 ‘관악(冠岳)’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도 보여서 ‘화기가 강하다’는 풍수적 해석도 따랐다. ‘불기운을 줄이기 위해 산 중턱에 물구덩이를 팠다’는 설화도 전한다. 산세가 수려해 ‘한강 남쪽의 소금강’으로 불렀다(『한국의 산지(山誌)』). 

이 관악의 정상부에 경관이 빼어난 봉우리, 연주봉이 있다. 수직의 가파른 단애 위에는 기와 건물 한 채가 위태롭게 서 있다. 옛사람들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짓고 ‘대(臺)’라는 명칭을 부여하곤 했다. 연주봉은 그렇게 연주대가 됐다. 구보는 남현동 쪽에서 연주대를 오를 때마다 등산로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오르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느끼곤 한다.

영·정조 때의 재상 채제공이 연주대를 찾았다가 두려움과 현기증으로 고생한 과정이 『번암집』에 전한다. 연주대는 677년 신라의 의상대사가 설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좌선하며 자신의 이름을 따 ‘의상대(영주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를 지었다. 조선 건국 후 고려 유신들이 이곳에 올라 개성을 바라보며 옛 왕조를 그리워한 데서 ‘연주대(戀主臺)’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연주대 아래에 절집 연주암이 있다. 대웅전을 비롯, 관음전·영산전·삼성각·효령각·종각이 들어서 있는데 연주대는 이 연주암의 꽃이다.

연주암은 양녕과 효령 두 왕자가 머물렀는데 효령대군 이보(李補·1396~1486)와의 인연이 더 컸다. 효령은 태종의 차남이자 세종의 중형이었다. 효령대군 덕에 연주암은 세 번에 걸쳐 개수되고, 약사여래상과 미륵존상, 삼층석탑 등의 불상들을 갖췄다.

그가 연주암에 그렇게 공덕을 쏟은 데는 왕위 계승 과정의 혼란과 관계가 있다. 효령대군은 2년간 이곳에 기거하며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동생 충녕대군의 등극을 축원했다. 부왕 태종은 기뻐했다.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치르며 왕위를 쟁탈한 전력이 있는 만큼 셋째인 충녕을 후계자로 삼고 싶은 자신의 뜻을 장남과 차남이 알고서 스스로 분수를 지키는 데 흡족해했다.

구보는 두 왕자 역시 부왕의 전례를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으로 본다. 태종이 ‘양녕은 호방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효령은 반대로 한 잔도 못 마시니 중국 사신을 대하는 자리를 자주 가져야 하는 국왕 자리에는 적당히 마시는 충녕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 18년 6월 3일 자에 전한다.

구보는 이 기사가 태종이 장남 양녕을 방탕을 이유로 폐세자한 후 셋째인 충녕을 후계자로 삼고 싶은 나머지 내건 핑계라고 여긴다. 같은 날 실록에 태종의 언급이 있다.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진중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성격이 곧아서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충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한다.”

양녕은 폐세자 후 경기 이천에 유배됐고, 효령은 연주암에서 지냈다. 산 중턱을 푸른 안개가 둘러싸 ‘자하(紫霞)’라는 이름을 얻었을 정도로 경승인 데다 조부인 태조 이성계가 정성을 쏟은 공간이던 까닭이었다. 총애하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오빠 강득룡이 관악산 자락에 기거하고 있던 연유로 태조의 관악산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명산고찰 따라』).

 

효령대군 영정. 사진=경기도문화재연구원
효령대군 영정. 사진=경기도문화재연구원

 


효령대군은 불심이 깊어 조선의 불교 배척 운동 아래서도 불교를 숭상했다. 무학대사가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 등 유서 깊은 사찰에서 불사도 여러 차례 행했다. 승려였던 생육신 김시습과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다(『청권집유』). 불교 미술의 조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금강산 유점사·오대산 월정사·월출산 무위사·만덕산 백련사 등이 중창되고, 회암사·흥천사 등 여러 절집이 수리됐다.

회화에도 관심을 갖고 여러 점의 불화와 불상 제작을 발원하고 시주했다. 1465년 원각사(탑골공원 터)의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범종을 조성할 때는 사찰에 머무르며 감독했을 정도로 열중했다. 부왕의 명복을 빌고 구천에 떠도는 넋들이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기 위해 도화서 화원 이맹근에게 ‘관경16관변상도’를 주문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대표적 왕실 불화로 꼽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세종이 두 형을 챙겼다. 양녕은 유배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살았고, 효령은 한강 하류에 누각 망원정을 짓고 시를 벗해 살았다. 서예에 정통했던 양녕은 숭례문과 경회루의 현판 글씨를 남겼고, 효령은 불교문화를 창달하는 데 이바지했다. 두 형제는 ‘피를 부르지 않고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군자들’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겸재 정선이 양녕이 묻힌 야산 국사봉을 묘사할 때 존경을 담아 관악산만큼 높게 그린 게 대표적 사례다.

효령대군 칭송 글도 효령각 기둥에 걸린 주련에 담겼다. “스스로 왕궁 나와 부처님 계신 곳 왕래하니, 천국을 우러러 연주대에 오르네(出自王宮通佛域, 仰瞻天國上仙臺).” 그를 왕처럼 묘사한 영정도 있다. 연주암 효령각에 보존된 이 영정은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용교의(용의 형상을 새긴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정면상이다. 긴 귀와 세운 엄지 등에서는 불화적 요소도 보인다(『경기문화재총람』).

효령대군 사후 조선 후기에 지역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이 자화상은 대군의 영정이 됐는데 지금껏 연주암에 모셔져 있다. 효령대군이 묻혀 있는 청권사(淸權祠)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종중 자격으로 영정을 모시게 해달라고 연주암에 청을 넣었으나 거절당했다. 영정을 600년간 모셔 온 터여서 효령대군의 혼백이 함께한다고 자부하는 까닭이었다.

두루마리 형태로 장롱에 보관하는 것을 지켜본 청권사 종중에서 연주암 창고 자리에 영정을 모시도록 1996년 효령각을 건립해 줘 오늘에 이른다. 효령대군의 영정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등을 거치며 조선 왕가의 영정들이 모두 소실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남은 까닭이다. 세종대왕 등 조선시대 국왕의 초상화나 동상을 만들 때마다 모델이 된다.

1560년 겨울 유성룡이 연주암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맹자』 1질을 20여 차례 읽었고, 18세기 인물 이익은 ‘연주대 유산기(遊山記)’를 남겼다. 1578년 허목은 여든넷의 나이에 연주대에 올라 왕자를 칭송했다. 구보는 유자(儒子)들을 가파른 산꼭대기로 오르게 만든 데서 효령대군의 덕을 확인한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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