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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언덕에 있었다…트로이 울린 ‘목마의 사연’

입력 2025. 04. 30   16:34
업데이트 2025. 04. 3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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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트로이 전쟁 유적 …
신화의 세계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다 

호메로스 서사시 속 신화

사실로 믿은 독일 고고학자
19세기 말 20년간 발굴
금·은·동 보물 출토되며 
실존 도시·실제 사건 판명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터키 관광지 트로이의 입구에 있는 트로이 목마 재현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터키 관광지 트로이의 입구에 있는 트로이 목마 재현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때 고(故) 이윤기 작가의 『그리스 로마신화』가 어린이, 심지어는 일부 성인의 스테디셀러로 인기를 누린 적이 있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제우스, 포세이돈, 디오니소스 등 그리스 신들에 대해서는 은연중 친숙하게 느낀다.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까지 가세하면서 우리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 바 있다. 

이러한 신화 이야기의 결말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번 연재의 주제인 트로이 전쟁이다. 기원전 12세기경 일어난 이 전쟁은 긴 세월 신화 속 이야기로만 간주돼 오다가 19세기 후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로 태양 아래 현실이 됐다.

사실상 트로이 전쟁의 원조는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반도에서 활동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연작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특히 전작에서는 각 도시국가(폴리스)를 대표하는 신의 자녀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트로이 전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헥토르, 파리스 등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영웅보다 후대인에게 자주 언급되는 말은 바로 ‘트로이 목마’라는 용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트로이는 어디에 있으며,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 지리적으로 트로이는 오늘날 튀르키예 소아시아 지방 차나칼레주(州) 북서부 해안 근처에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참고로 해석하자면 전쟁은 크게 신화적 요인과 현실적 요인에 의해 발발했다.

우선 신화적 측면에서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올림포스 신들의 갈등에서 촉발했다.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가 내민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진 황금 사과의 진정한 주인공 자리를 놓고서 세 여신(헤라·아테나·아프로디테)이 경쟁하면서 벌어졌다. 심판으로 등장한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안겨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꾐에 넘어가 황금 사과를 그녀의 차지로 결정했다.

약속한 대로 아프로디테는 당시 지상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진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줬고, 파리스는 비밀리에 그녀를 트로이로 데려갔다. 문제는 헬레네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다는 점이었다. 납치 사실을 알게 된 메넬라오스는 격노했다. 즉시 왕비를 되찾고 트로이에 복수하기 위해 형인 미케네 왕 아가멤논과 함께 그리스반도 전역을 돌며 군대를 모집했다. 이렇게 결성한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 원정길에 올랐다. 이어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네스토르와 같은 영웅들이 줄이어 참전했다.

그렇다면 현실적 차원의 원인은 무엇일까? 신화의 이면에 숨은 트로이 전쟁의 실제 요인은 경제적·군사적 측면에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에게해의 무역로 쟁탈전이었다. 당시 트로이는 에게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 근처에 있는 큰 항구도시로 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반도의 폴리스 간 에게해의 제해권을 놓고 다투는 와중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 문명권 폴리스들이 트로이를 정복해 상업적 이익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터키 차나칼레의 고대 도시 트로이 유적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터키 차나칼레의 고대 도시 트로이 유적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트로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금목걸이. 사진= 트로이박물관 소장
트로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금목걸이. 사진= 트로이박물관 소장



트로이 전쟁은 무려 10년 동안 지속됐다. 그리스 연합군은 단기전을 예상하며 호기롭게 원정길에 올랐지만, 이후 상황은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트로이의 성곽은 의외로 견고했기에 함락시키지 못한 채 전쟁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영웅들 간 결투가 이어졌고, 급기야는 그리스군 최고 전사로 손꼽힌 영웅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왕자 헥토르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 덕분에 전세는 그리스군에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곧 아킬레우스마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쏜 화살이 급소인 ‘발뒤꿈치’에 명중하면서 죽고 말았다. 장기간의 전쟁은 그리스 장군 오디세우스의 ‘트로이 목마’ 계략으로 마침내 그리스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거대한 목마 속에 숨어 성 내부 잠입에 성공한 그리스 결사대들이 방심한 트로이인들 몰래 굳게 잠긴 성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들의 개입과 인간 영웅들의 쟁투라는 모험으로 가득 찬 트로이 전쟁은 무려 3000년 동안이나 신화 속 이야기로만 알려져 왔는데, 드디어 19세기 말 한 인물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주인공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19세기 독일의 사업가이자 고고학자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내용을 기초로 트로이 유적을 발굴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호메로스의 저술을 읽으며 트로이의 실존을 확신하고 언젠가 발굴을 통해 이를 입증하리라 마음먹었다. 젊은 시절 사업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는 드디어 1870년 평생의 꿈이던 트로이 유적 찾기에 나섰다. 끈질긴 고고학 분야 공부와 집념 어린 탐사 준비, 그리고 그보다 먼저 취미 삼아 트로이 유적 발굴을 시도해 온 프랭크 칼버트의 협조 등에 힘입어 현재 튀르키예 서부 지역 히사를리크 언덕을 고대 트로이의 위치로 확신한 그는 오스만제국 정부로부터 허가를 득한 1870년부터 발굴에 착수했다.

이후 과업은 그가 죽은 1890년까지 무려 2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발굴 초반에는 유적층을 훼손하는 실수도 있었지만 곧 트로이가 실존했고, 수준 높은 문명까지 향유한 물적 증거들을 찾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873년 트로이 유적 발굴지에서 금, 은, 청동으로 제작된 다량의 보물을 발견한 슐리만은 이를 트로이 마지막 왕인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황금 왕관, 목걸이, 귀걸이, 단검 등의 유물이 포함돼 있었다. 도자기, 석기, 청동기 등 다른 재질의 유물도 출토됐다. 특히 발굴을 통해 성벽, 주거지, 그리고 방어시설 존재를 입증하는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트로이가 실존한 폴리스였고, 트로이 전쟁도 신화가 아니라 실제 사건으로 판명됐다. 

슐리만의 초기 발굴과 이어진 후속 연구에 힘입어 고대 트로이 유적지는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오늘날 트로이 유적지에서 관람할 수 있는 대표적 구경거리로는 전쟁 당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겨룬 장소로 추정되는 트로이 성벽, 마차와 병력의 빈번한 이동을 보여주는 성문과 도로,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한 궁전터, 1975년 목재로 제작해 세운 거대한 ‘트로이 목마’ 조형물, 그리고 2018년 개관한 트로이 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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