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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제독 탄신 480주년... 충무공 '애국애족 정신' 되새긴다

입력 2025. 04. 25   16:47
업데이트 2025. 04. 2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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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忠武公) 탄신일은 1545년 4월 28일 이순신(李舜臣) 제독이 태어난 날을 기념해 제정됐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위국헌신한 충무공의 충의를 기리기 위함이다. 28일 충무공 탄신 48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애국애족 정신을 조명해 본다. 글=서현우/사진=한재호 기자

충무공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1592년 4월부터 1598년 11월까지 계속된 전쟁에서 뛰어난 지략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구했다.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았다.

충무공은 1576년 32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 함경도 동구비보 지역 권관(종9품)으로 부임해 최전방 국경 수비 무관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수군과의 첫 인연은 1580년 7월 전라좌수영 발포진 수군만호로 부임하면서다. 이어 1586년 함경도 조산보 수군만호, 1587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 1591년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은 1592년 5월 4일 함대를 이끌고 옥포로 향했고, 7~8일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적선 40여 척을 격파했다. 5월 29~6월 10일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에서는 거북선을 최초로 투입해 적선 70여 척을 박살 냈다. 7월 8일에는 한산도해전(한산대첩)에서 적선 59척을 쳐부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8월 24일~9월 2일 부산포해전에서도 적선 130여 척을 파괴하는 대승을 거뒀다.

충무공은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으나 1597년 파면돼 백의종군 길에 올랐다. 같은 해 7월 18일 수군의 칠천량해전 참패 후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았다. 그러나 상황은 처참했다. 12척의 전선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충무공은 병사들이 자신감을 얻도록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같은 해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130여 척의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선 적선 200여 척을 격파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충무공은 이 해전에서 교전 중 총탄을 맞았다.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에 군사들이 슬퍼하고,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해 최후의 말을 남기고 끝내 숨을 거뒀다.

충무공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일찌감치 감지했다. 1591년 수군절도사로 제일 먼저 한 일이 전선·군기 보수였다. 판옥선과 거북선을 건조하고 끊임없이 훈련하며 전투력을 높였다. 군량미, 총통, 화약, 화살 등을 비축해 대비도 강화했다. 거북선 제작이 완료되고 하루 뒤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은 충무공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군을 없애야 한다는 청이 임금에게 올려졌을 땐 수군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바다를 건너오는 적은 수군으로 막아야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국록을 먹는 신하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몸을 던져 그 은혜를 갚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이 닥쳤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았고, 목숨을 걸고 싸웠다.

사후 1643년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는 조선 시대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중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에게 사후 내려진다. 살아생전의 행적을 참고해 신중하게 결정됐다. 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드는 것을 ‘충’이라 하고, 적을 물리쳐 치욕을 막는 것을 ‘무’라고 했다.
충무공(忠武公) 탄신일은 1545년 4월 28일 이순신(李舜臣) 제독이 태어난 날을 기념해 제정됐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위국헌신한 충무공의 충의를 기리기 위함이다. 28일 충무공 탄신 48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애국애족 정신을 조명해 본다. 글=서현우/사진=한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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