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in 국방일보 - 1990년 5월 4일 자
어쩌면 대한민국 전 영토는 상흔의 박물관입니다. 6·25전쟁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희생의 흔적이 전국 방방곡곡에 남아 있습니다. 곳곳마다 치열했던 전장의 흔적이 그날의 아픔을 전합니다. 그 처절함을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 중 한곳이 ‘백마고지’입니다.
395m 높이에 불과한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국군 9사단과 미군이 중공군과 혈전을 벌여 전사자가 속출했던 곳입니다. 정전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백마고지에는 무려 30만 발이 넘는 포탄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미 5공군 등의 항공기도 754회나 출격, 이곳을 폭격했습니다. 중공군 1만5000명, 아군 34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등 처절한 전투가 12차례나 이어졌던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공방전의 현장입니다.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전투 끝에 9사단은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을 격멸했고 정전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 치열했던 전장이 안보관광지로 거듭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육군은 이곳의 상징성을 잘 알기에 종합전적지로 개발, 1990년 5월 3일 성대한 준공식을 했습니다. 그 이튿날 국방일보는 이 ‘안보교육 성지’의 탄생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6·25동란 당시 최대의 격전장이었던 백마고지전투 지역 일부가 종합전적지로 개발돼 안보관광지로 일반에게 공개됐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기사는 관련 내용을 차분하게 전달합니다. 기사에 의하면 전적지는 총 5억7000여만 원의 예산을 들여 1만여 평 규모로 약 7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공됐습니다. 전적지는 아군 및 중공군 전몰장병을 추도하기 위한 ‘회고의 장’과 아군의 전승과 전공을 기리기 위한 ‘기념의 장’, 조국의 통일의지를 다지기 위한 ‘다짐의 장’으로 구성돼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고 미래를 위한 각오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사는 흥미로운 백마고지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백마고지전투에서 결국 9사단이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을 격멸, 정전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고 김일성은 3일간 식음을 전폐했다는 후일담입니다.
육군이 백마고지 일대를 전적지로 조성한 배경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준공식 전년에 철원 안보관광지를 개발, 공개한 뒤 견학인원이 100만 명을 넘어서면서 백마고지전투에 관심이 높아졌고 견학 요청이 쇄도하기 때문이란 설명입니다.
현재 백마고지전투 전적지는 전국 각지는 물론 외국에서 찾아오는 안보교육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햇살이 따스해지는 요즘, 잠시 이곳을 찾아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돌아보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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