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 - 랜덤의 경제
피규어·키링 등 들어 있는 캡슐 뽑는 ‘가차숍’ 인기
뭐가 나올지 기대하며 여는 순간의 ‘설렘’ 소비
포춘쿠키·띠부띠부씰…뽑기의 마케팅
생활·산업 전반에 퍼지며 문화로…
최근 거리에서 쉽게 ‘가차숍’을 볼 수 있다. 돈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캡슐이 나오는 것으로,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 보던 뽑기 기계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의 가차 기계는 가격대나 내용물 면에서 문방구 뽑기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다. ‘가차’로 부르는 이유는 일본에서 들여온 상품이어서다. 일본어로 ‘가차가차(ガチャガチャ)’는 기계의 손잡이를 돌릴 때 나는 찰캉찰캉 소리를 뜻한다.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가차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빠르게 늘고 있다.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는 무려 20개 넘는 ‘가차숍’이 문을 열었다.
소비자들이 이곳에 매료되는 이유는 확실하다. 2025년 트렌드로 소개한 바 있는 ‘무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캡슐 속에 들어 있는 상품은 피규어, 미니어처, 키링, 문구 등 소장 욕구를 강하게 일으키는 귀여운 것들이다. 특정 가게나 특정 시즌에만 볼 수 있는 한정판이 많아 소비자들은 일부러 ‘가차숍 투어’를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차의 가장 큰 매력은 어떤 게 나올까 기대하며 캡슐을 여는 순간 느끼는 설렘이다.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뽑기’는 오래전부터 마케팅에 이용됐다. 과자 안에 운세가 들어 있는 ‘포춘쿠키’부터 과자나 빵 봉지에 동봉돼 있는 ‘띠부띠부씰’, 아이돌 앨범 포토카드도 이에 해당한다. 포켓몬빵이 재출시되며 한동안 포켓몬스터 ‘띠부띠부씰’을 모으려는 사람들로 편의점 오픈런까지 발생하는가 하면, 좋아하는 가수의 포토카드를 얻고자 팬들이 앨범을 대량 구매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만큼 뽑기는 소비에 재미를 더하는 강력한 기술이다. 이러한 무작위 추첨 방식, 즉 ‘랜덤(random)’이 일상생활과 산업 전반으로 확대되며 일종의 문화가 되고 있다. 랜덤을 활용하는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랜덤으로 일상에 재미를 더한다. 최근 몇몇 네일숍에선 손님들에게 디자인을 고를 때 ‘랜덤’이라는 메뉴를 제공한다. 디자인북에서 특정 디자인을 손님이 직접 고르지 않고, 어느 한 페이지를 무작위로 짚어 당첨된 디자인으로 네일을 만들어 준다. 혹은 여러 옵션을 종이에 적어 놓고 네일의 모양 중 하나, 색깔 중 하나, 재료 중 하나를 무작위로 뽑아 그 조합으로 디자인을 만드는 식이다. 예상치 못한 조합이 어색할 순 있지만, 평소 즐겨 하는 게 아닌 신선한 스타일을 시도하는 재미가 있다.
마치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처럼 랜덤 방식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여행 준비를 마친 뒤 다채로운 목적지를 게임판 위에 적어 두고 주사위를 던져 당첨되는 곳으로 즉석여행을 떠나는가 하면, 전국 지도를 바닥에 펼쳐 놓고 위에서 볼펜을 떨어트려 펜 자국이 찍힌 곳을 목적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 선택되더라도 오히려 남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을 발견한다는 것에서 재미를 느낀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활동에 랜덤 요소를 더하면 즐거운 놀이가 된다. 많이 알려진 ‘랜덤 필터 챌린지’가 그렇다. 스냅챗 앱에서 랜덤 필터를 켠 뒤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면 무작위로 얼굴을 변형하는 필터가 적용돼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때 물을 머금고 있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을 뿜은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이 같은 원리로 번화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네 컷 사진’ 기계에도 랜덤 프레임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포토이즘에서 크리스마스 시즌 선보인 프레임은 랜덤으로 주인공을 지정해 줬다. 여러 명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 촬영할 때는 알 수 없지만, 인쇄한 사진엔 한 명에게 ‘나야 나’라는 문구가 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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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랜덤 요소는 소비자를 불러 모으는 마케팅 수단으로, 다양한 유통채널에서 활용된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HDC아이파크몰은 국내 최대 규모의 가차숍을 열어 개점 첫 달에만 약 4만 명이 다녀갔다. 편의점 CU 역시 시범적으로 몇 개 지점에 캡슐토이를 판매하는 가차 기계를 도입했다. 팝업스토어에서도 굿즈 판매에 랜덤 요소를 필수적으로 활용한다. 가차 기계에 굿즈를 넣어 팔기도 하고, 방문객이라면 꼭 갖고 싶어 할 만한 굿즈를 랜덤박스 형태로 판매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에서는 랜덤 마케팅으로 부상한 기업도 있다. 중국 장난감 제조업체 ‘팝마트’다. 내용물을 알 수 없도록 랜덤박스 안에 피규어를 담아 판다. 저품질의 피규어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제작한 고급 제품이며,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희소한 디자인으로 어떤 제품이 나와도 만족스럽다고 한다. 젊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10년 새 중국 내 매장 수가 370개를 넘길 만큼 급속도로 성장 중이다.
흔히 불황이 찾아오면 복권 판매가 늘어난다고 한다. 랜덤 문화의 확산 역시 현재 어려운 경제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만 랜덤 문화는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행심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요즘 랜덤 뽑기의 특징은 ‘꽝’도 없고 ‘대박’도 없어서다. 소비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큰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 평범한 선택을 대신하는 특별한 사건을 만들고자 한다. 일상적인 사진 찍기도 랜덤이 더해지면 특별한 이벤트가 된다.
랜덤은 ‘선택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도 하다. 취향이 세분되면서 운동화 하나를 구매하려 해도 브랜드, 디자인, 기능, 가격 등 소비자들이 고려할 요소가 너무나 많아졌다. 더욱이 ‘베스트템’ ‘추천템’ 콘텐츠나 다른 사람들의 구매 후기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어느샌가 현대인은 ‘실패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선택을 포기하고 랜덤에 결과를 맡긴다는 것은 소소한 모험에 해당한다. 감당할 수 있는 일탈을 시도하며 정서적 해방감을 얻는 것이다.
랜덤 뽑기를 적절히 활용하면 카페에서 메뉴를 고르는 일도 동행과 특별한 추억으로 만들 수 있다. 랜덤 뽑기의 재미가 지출로 이어질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온라인에는 가차숍 혹은 팝업스토어의 가차 기계에 돈을 넣다 보니 ‘어느새 몇십만 원을 썼더라’는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굿즈를 직접 골랐다면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하나만 샀을 것이다. 즐거움에도 절제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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