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
3·1운동 소식 듣고 결의안·포고문 발표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지원·역할 제시
국제적 공론화·경제적 책임 담당 호소
각지 임시정부 난립에 파벌싸움 우려
지도자 단합 조건 내걸고 내무총장 취임
조직 구성·업무 체계 구축 등 본격 행보
3·1운동과 대한인국민회
1919년 3월 1일 대한의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회와 흥사단 일로 동분서주하던 도산은 3월 9일 현순 목사의 전보로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현순은 국내 민족 지도자들이 3·1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미국·유럽에 전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파견한 인물이다.
소식을 들은 도산은 즉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겸 임시의장 백일규와 대책을 협의하고, 중앙총회장 안창호 명의로 ‘독립선언의 포고’를 발표했다. 이어 3월 13일에는 전체 대표회의를 개최해 항구적인 독립운동 방침에 대한 결의안과 포고문을 발표했다. 결의안과 포고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주요한, 『안도산전서』).
<결의안(요약)>
① 재미 한인의 모든 독립운동 지원 행사는 전체 대표회의 결의에 의해 행하며, 그 행정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일임한다.
② 중앙총회 사무부서를 확장하고 예산은 7만6000달러를 우선 책정한다.
③ 원동과 구미 각지에 운동경비 조달을 위해 애국 특별 의연금을 모금한다.
④ 서재필을 외교 고문으로 임명해 필라델피아에 외교 통신부를 설치하고 매달 800달러의 경비를 지원한다.
⑤ 원동에 대표를 파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봉사한다.
⑥ 이승만을 필라델피아에 보내 서재필을 돕게 한다.
⑦ 기타 영문과 한문으로 선전문을 출판해 배포하고, 국기를 만들어 동포에게 보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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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고문(요약)>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비애에 싸여 있다가 이제 비로소 큰일을 일으켰으니, 이는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이다. 이 소식을 받고 기쁨과 슬픔이 아울러 나와 피가 끓으니, 실로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우며, 국내의 2500만 겨레가 함께 일어나는 이때 느낌이 간절하여 정신이 막막하니, 이는 성공의 길이 간난(艱難)함을 염려하는 까닭이다.
우리의 독립선언은 독립하겠다는 의사 발표요, 그 뒤를 받들어 할 일은 이로부터 독립을 찾을 때까지 허다하게 많다. 그런데 세계 역사로 보아서 한때에 일어난 열정만으로 성공한 일이 별로 없고, 어느 국가나 값없이 얻은 독립이 없으며, 더욱이 우리의 사정은 반드시 악전고투하고 무량한 피를 흘려야 성공이 있을 것이다.
용감한 자는 큰일에 임하여 대담하고 신중함으로 일을 치르는 것이니, 우리는 허영을 경계하고 진실한 행동으로 독립운동에 응원을 끝까지 할지며, 죽음으로써 성공하기를 기약하고 먼저 다음 3항을 실천하자.
① 우리는 피 흘린 후에 목적이 관철될 것을 각오하고 마음으로 굳게 맹세할 것이며, 우리의 운동이 단결과 행동 일치를 요구하나니 동포 간에 비밀이 없을 것이다.
② 재미 한인은…. 미국의 언론 기관과 종교 기관을 통하여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선전함으로 국제 공론을 일으키는 데 노력할 것이다.
③ 재미 한인은 다른 곳 동포에 비교하여 경제적 여유가 있은 즉, 내외 각지 독립운동의 경제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포고문의 내용은 자못 비장하다. 독립선언이 거족적으로 일어나 감격스럽고 거룩한 일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지의 표명에 불과하며 이제부터 더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장기적으로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재미 동포들이 해야 할 일은 국제 공론을 일으키는 일과 각지에서 전개될 독립운동의 경제적 책임을 담당하는 일이라는 점을 실천 강령으로 제시했다. 당시 재미 동포들의 형편이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한들, 그들 역시 온갖 차별을 받으며 노동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은 해외 독립운동,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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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
도산은 국민회 결의에 따라 미주 대한인국민회의 특파원 자격으로 정인과와 황진남을 데리고 4월 5일 캘리포니아를 떠나 5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홍콩에 들러 블라디보스토크와 서울에서도 각각 임시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상태로는 해외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돼 파벌싸움으로 번질 것이고, 국제사회에서도 대표성을 인정받기 어렵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도산은 이미 상하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내정됐으나 이런 분위기에서 취임할 수는 없었다.
도산은 5월 26일 북경로 예배당 연설에서 통일을 역설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단합하여야 합니다. 세계가 지금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정부를 영광스러운 정부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
6월 4일 연설에서는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좋더라도 통일을 잃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통일을 방해한다면 아무리 자기가 국가를 위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충신이 되고 맙니다”고 했다. 또 6월 25일 연설에서는 “나는 내무총장으로 있는 것보다 한 평민이 되어 어떤 분이 총장이 되든 그분을 섬겨서 우리의 통일을 위하여 힘쓰고 싶습니다”고 했다.
상하이의 청년들은 매일 도산을 찾아와 내무총장으로 취임할 것을 재촉했다. 도산은 ①각지의 독립운동 영수(領袖)들을 상하이로 모으는 일과 ②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자신의 직위를 내어놓고 다른 사람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다짐받고 비로소 6월 28일 정식으로 취임했다. 국무총리로 내정된 이승만이 취임하지 않아 국무총리 대리 역할도 겸했다.
도산은 취임 즉시 미국에서 가져온 2만5000달러로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각료·직원들의 근무 원칙을 제정한 뒤 국민의례로 일과를 시작했다. 이어 사료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대한적십자회를 창립했다. 기관지 『독립』을 창간하고, 연통제와 교통국을 수립했다. 이로써 명목뿐이던 임시정부는 업무 체계를 갖추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기본 조직을 구성했다. 그리고 도산은 본격적인 임시정부 통합 작업을 추진했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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